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업장 시리즈

저조한 상태로 살아가기

일、이 글이 저조한 상태 연작의 마지막 글이 될 수도 있겠다
지난 몇 년간 저조한 상태에 관해 너무나 많은 글을 썼다.
일본의 모리타 요법은 하나의 궁극적인 답을 제시한다. 고통은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한다.
많은 사람이 이론적으로는 꽤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막상 저조한 상태가 찾아오면 여전히 끌어안지도, 허용하지도 못하며, 심지어 알아보거나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계속 이름 붙이기
언어와 문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심층 정신과 무의식의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계속 이름을 붙이는 일에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 바라보고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여전히 치유와 연결의 힘이 있다. 지난 몇 년간 업장, 얽힘, 과제 수행자 소아, 야경꾼 소아, 용암, 본래의 온전함, 천인합일 등 정확하고 실질적으로 붙인 이름들은 지속적으로 작용해 왔다.

저조한 상태: 바라보기->허용하기->받아들이기->끌어안기->자연스럽게 벗어나기. 어디에서 막히는가?
뒤쪽 단계가 아니다. 산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벗어나게 된다. 끌어안기도 그리 어렵지 않은 듯하다. 마음의 힘이 중간 정도일 때는 충분히 끌어안을 수 있다. 마음의 힘이 약할 때 바라보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막힌다.

이、저조한 상태를 허용하기
저조한 상태를 허용하자. 《사람은 크게 이루기 전까지 오랫동안 중간 이하의 마음의 힘과 상태에 머무른다》.

마음의 힘이 약해도 충분하다
일에서도, 사교에서도, 마음에서도 마음의 힘이 약한 것을 허용한다.
마음의 힘이 약할 때는 판단력과 메타인지가 크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많은 업장을 소화한 상태라면 일상에 대처하기에는 충분하다. 실제로 구직, 업무, 사교, 마음의 일, 마음 코칭 모두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마음의 힘이 약해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으며, 천인합일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은 조건 없이 괜찮으며, 충분히 괜찮다. 이것 또한 인간이 지닌 본래의 온전함의 강력함이다. 《업장을 경외하기》 역시 본래의 온전함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용암. 사실 대다수 사람은 대학 입시, 대학원 입시, 업무에서의 진전, 독서를 통한 돌파를 모두 마음의 힘이 약한 상태에서 해낸다. 내가 마음의 힘이 약하고 상태가 저조한 가운데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이 바로 충분하다는 실증이다.
저조한 상태는 우리에게 이렇게나 익숙한데, 왜 무명에 빠지고 두려워하며 배척해야 하는가.
마음의 힘이 약하고 상태가 저조한 것과, 마음의 힘과 상태가 극도로 낮은 것은 다르다. 극도로 약한 마음의 힘과 극도로 저조한 상태, 전면적인 연결 단절, 생존의 임계선, 실존적 위기, 야경꾼 소아의 PTSD를 저조한 상태에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극도로 저조한 상태는 받아들였는데, 저조한 상태는?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라는 글은 ‘극도로 저조한 상태에서 살아가기’에 무게를 두었다. 핵심은 허용하느냐 마느냐였다. 자신의 연결 단절과 해리를 허용하고, 자신의 무능을 받아들이는 것. 그 글은 마지막으로 받쳐 주는 바탕이자 실상이었다. 소아는 이미 완전히 무너지고, 자기는 이미 해리되고, 모든 연결이 끊어져 오로지 이드의 원기에 기대어 버티지만, 오히려 절망적인 곳에서 생기가 솟는다.
극도로 저조한 상태에서는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기다리고, 힘쓰지 않고, 맞서지 않을 줄 알면서, 저조한 상태에서는 오히려 그러지 못한다.
저조한 상태는 분명 형편이 더 낫고, 마땅히 더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하지만, 소아와 자기애가 다시 충전되고 탐진치의 업장이 되돌아온다.

세상에는 오아시스가 없다
자유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가며 감옥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사회=소외이며, 사회 안에는 오아시스가 없다. 유일한 오아시스는 지금 이 순간 고비사막 위에 있는 자신의 마음속이다. 유일하게 발 디딜 수 있는 곳은 지금 이 순간, 발밑이며, 지금 이 순간은 원만하다. 깨어 있음이란 어떤 환상이나 집착도 없이 오직 실상만 있는 것이라면, 저조한 상태와 스스로 저조한 상태에 있음을 허용하는 이 마지막 허용 위에서 이제 편안히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힘쓰기를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손을 놓을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은 매이지 않은 배와 같다. 이 마음은 여기에 편안히 자리 잡는다. 모든 환상과 집착을 깨뜨리고 자신의 실상 속에서 살아간다.

삼、강한 마음의 힘과 높은 에너지를 향한 탐진치
깨달았다고 반드시 스스로 남다른 경지에 오른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는가. 마음 상담이나 마음 코칭을 하려면 반드시 에너지가 높아야 하는가. 에너지가 높지 않으면 어떤가. 에너지가 높지 않은 게 내 탓인가.
강한 마음의 힘과 높은 에너지를 향한 탐진치의 뿌리는 여전히 바깥에서 구하는 데 있다. 문제 풀이에 길든 사람이 사회적 시계 아래에서 앓는 노력 강박, 막판 질주 강박, 폐관 수련 강박이다. 삶을 고3, 재수 시절처럼 여기고, 자신의 에너지가 높아지고, 비약하고, 처지가 뒤바뀌기를 바라며, 자신은 실패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측면은 문제 풀이에 길든 사람이 사회적 시계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베팅하며 빠져든 곤경이다. 철없을 때 대학 입시 원서를 내고, 업계에 들어가 직업을 고르고, 맞선을 보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서른 살에야 막 눈이 트이지만 이미 곤경에 깊이 빠져 있고, 용감한 노라가 될 배짱도 없어 자신을 심리적으로 조종하며 강한 마음의 힘과 높은 에너지로 영문 모를 역전을 이루는 환상만 품는다.
노력에 대한 집착: 애써 상태를 끌어올리기->자신을 몰아붙여 성과 내기->처지 뒤집기. 저조한 상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수행 강박과 노력 강박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해를 끼치는지 여기서도 드러난다.
수행은 허구적인 개념이다. ‘나’가 ‘나’를 없앨 수 있는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고요히 기다리는 ‘나’ 역시 기다림 끝에 찾아온 것이다.
욕심도 바람도, 근심도 걱정도 없을 때, 상태가 높지 않으면 또 어떤가. 그것이 바로 높은 상태 자체가 아닌가.

사、저조한 상태에는 실상이 있다
《심층 정신 속에서 살아가기: 도의 세계로 돌아가기》에서 썼듯, 무아이며, 업장 역시 도이고, 저조한 상태에는 실상이 있다.

(一)저조한 상태는 사회의 문제이자 역사의 문제다
나의 모든 저조한 상태, 침체, 방황, 괴로움, 고통, 무명 속에서 겪는 모든 시달림, 모든 개인적인 문제는 사회와 시대의 문제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다. 사실이 그러하다. 침체기, 바닥, 저조한 상태는 역사의 과정이며, 내가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반 고흐, 소식, 왕안석조차 역사의 과정을 따라 부침을 겪었는데, 하물며 나야 어떻겠는가.
저조한 상태에는 이유와 인과가 있다. 맹목적이고 거칠게 저조한 상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저조한 상태는 좋은 것이다. 《허약함과 예민함은 좋은 것이다》: 타인과 외물이 나를 억누르고 제약하는 작용이 더욱 뚜렷해진다.

(二)저조한 상태는 철학의 핵심이다
변증법적 유물론
저조한 상태는 자신의 내적인 요인과 운명 및 환경이라는 외적인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이는 인간과 세계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핵심적인 고리다. 마음의 힘은 자유와 능동성을 담는 매개이기도 하다. 마음의 힘과 상태는 모두 내부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외물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있다. 아무 근거 없이 마음의 힘과 상태를 끌어올리려는 것은 관념론이지, 유물론적이고 객관적인 태도가 아니다. 인간의 능력에는 경계가 있다. 무능과 무위, 멈출 곳을 알아 위태로워지지 않는 경계다.
설령 정말 언제나, 내내 마음의 힘과 상태가 100% 충만하더라도 여전히 인생의 유한함, 고난, 곤궁, 어쩔 수 없음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의 일생은 언제나 유한한 마음의 힘으로 무한한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상태가 충만하다는 것의 의미가 그저 유한함과 어쩔 수 없음과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저조한 상태를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닐까. 무명은 인간의 숙명이다. 깨어 있음은 전지전능함이 아니라 무명 속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무아 VS ‘저조한 상태-아집’의 조합
《업장을 경외하기》와 더불어 자성에도 감사한다. 자성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왔고,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원만함을 안다. 《걸음마다 원만하다》. 저조한 상태는 자성이 업장에 맞서고 있는 실제 상태다. 이른바 저조한 상태는 이미 자성이 최선을 다하고 자기가 온 힘을 쏟은 끝에 도달한 상태의 전부인데, 소아는 뛰쳐나와 공격하고 깎아내리려 하며, 가혹한 초자아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려 한다. 그래서 부정적 자아가 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저조한 상태에 빠뜨리는 것은 안팎의 업장이고, 자신을 빠져나오게 하는 것은 자성의 빛이다. 언제나 그랬다. 자성을 믿고, 자성에 맡기고, 힘을 가하지 말고, 들쑤시지 말자. 그런데 왜 ‘나’는 자성과 가까이하고 연결되기보다 소아와 업장에 가까이하는 경우가 많은가?
‘나’는 실상이 아니다. ‘나’는 저조한 상태에서 태어나며, 저조한 상태의 결과이자 유인 중 하나이지 출발점이나 근원이 아니다. 이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의식은 객관적 현실에서 생겨난다. ‘나’는 느낌이며, 업장과 마음의 힘, 이드의 리비도와 사고가 융합된 결합체다. 극도로 저조한 상태에서도, 중간 이상으로 좋은 상태에서도 무아다. 진정한 주체성이 발휘될 때는 무아다. 자성이 천인합일을 이룰 때는 ‘나’가 태어나지 않는다. 심층 정신 속에서 살아가기의 근본은 사고와 심층 정신, 자성 사이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
저조한 상태일 때만 ‘나’가 있다. ‘나’는 가짜 주체성이다. 그러므로 ‘나’는 본래 업장과 가깝고 자성과 연결되지 않는다. 극도로 저조한 상태가 크나큰 공포나 난관인 것은 아니다. ‘저조한 상태-나’라는 조합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관문이며, 수행자 소아가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되는 미혹의 장벽이 있는 곳이다. 사실 중간 이상으로 좋은 상태일 때도 저조한 상태는 있지만, 아집에 사로잡혀 억지로 요구하지 않는다. 아집으로 저조한 상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저조한 상태다. 저조한 상태라는 명명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을 배척하고 연결을 끊는 표현인 경우도 많다.
깨달음의 본질은 업장과 소아가 흩어지고 자성이 드러나며, 나도 집착도 없는 것이다. 저조한 상태는 일시적인 상태일 뿐이다. 상태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자성은 저절로 그러하며, 부침에 맡긴다. 자연스러운 상태야말로 진정으로 높은 상태다. 우리는 반 고흐가 내적으로 소모되고 저조한 상태에 있었다고 보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는 지극히 소박하고 자신감이 있었으며, 남다른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는 소아가 없었다.

무아와 무사
생명과 사고는 대자연이 무기물에 준 선물이다. 각자의 사고는 세계와 대자연의 작은 일부이며, 모든 사물은 서로 의존하고 연결되어 있다. ‘나’와 ‘사사로움’이 가장 큰 업장이자 어리석음이다. 독립적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애초에 없다.
《장자·대종사》: “이제 천지를 거대한 용광로로 삼고 조화를 위대한 대장장이로 삼는다면, 어디로 간들 안 될 것이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나는 없다. 나는 용광로가 선택한 기물이 아니라 이 용광로의 일부다.

(三)저조한 상태는 운명이다
운명 자체의 리듬을 허용하자. 경제적 자유는 재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유에, 지혜와 담력에 달려 있다. 마음의 힘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힘이나 상태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자유와 지혜, 담력에 달려 있다.
본래 평범한 시골 아이였고, 시대의 수혜를 타고난 사람도 아니며, 겪어 온 일도 평범하다. 마음의 힘이 약하고 상태가 저조한 것은 정상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 순탄하고, 기세가 높고, 밝으며, 온갖 복을 누리지만 그래도 마르크스주의와 장자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들에게 무슨 높은 경지의 상태가 있겠는가. 업장이라는 크툴루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드러난다. 《인간의 수준 구분》에서 말했듯 버핏과 멍거 역시 평범한 층위에 갇혀 있고, 멍거는 만년에 혼미한 채 좌절했다. 《용감한 노라》를 선택해 고비사막의 밤길을 걷기로 했다면, 고생은 마땅히 따르는 것이다. 저조한 상태에 있는 것은 어려운 길을 택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四)저조한 상태는 전장 그 자체이며, 대타자와 함께 지내고 싸우는 최전선이다
《우리 세대의 전장은 마음속에 있다: 가장 중요한 친구와 적은 모두 자기 자신이다》. 저조한 상태와 약한 마음의 힘을 친구로 여기고, 진실하고 어쩔 수 없고 평범한 자신과 연결하며, 자신이 저조한 상태에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부정적 자아를 적으로 여긴다. 결론은 안심하고 저조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강한 마음의 힘’과 높은 상태를 향한 탐진치의 망념 자체가 대타자와 엘리트주의의 규율이다.
반 고흐 증후군: 마음의 힘이 약하고 상태가 저조한 가운데 힘겹게 걸어가며 끊임없이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여전히 내적으로 소모되고 자신을 공격한다. 마르크스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소식은 고독했고, 반 고흐는 내적으로 소모되다가 총상을 입고 죽었다. 《1863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첫 다툼과 불화》.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침체기에는 모두 저조한 상태였다. 위인과 성인조차 아무 근거 없이 상태를 통제할 수 없는데,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는가.

오、저조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심층 정신 속에서 살아가기: 도의 세계로 돌아가기》의 의미는 중간 이상으로 강한 마음의 힘을 지닌 상태에서 바라본 세계의 전모에 있다.
《저조한 상태에서 살아가기》는 《심층 정신 속에서 살아가기》, 《더 높은 차원에서 살아가기》,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의 일부다.

죽은 뒤의 여생
마음의 힘이 약하고 상태가 저조해도 충분하며, 그렇게 지낼 가능성이 크다. 죽을 때까지 저조한 상태여도 되며, 그것을 허용한다. 저조한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용감한 노라가 되어 죽어도 여한 없이, 죽음을 향해 살아가기로 했다면, 죽은 뒤 우주로 돌아가 모든 것이 평등하게 안식한다면, 죽음은 유일한 평등이자 공정함이다.
죽음을 끌어안고, 앞당겨 누리고, 즐기자.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여기고 남은 생은 마음 가는 대로 살자(아우렐리우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재난 뒤에 남은 삶, 죽은 뒤에 남은 삶, 죽기 전에 남은 삶.
장자의 여덟 가지 없음: 나도 집착도 없고, 능함도 함도 없으며, 욕심도 바람도 없고, 근심도 걱정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