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바퀴벌레론
장자·바퀴벌레론: 바퀴벌레는 수억 년 동안 존재하면서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바퀴벌레론
바퀴벌레는 지구에 수억 년 동안 존재해 왔다. 바퀴벌레가 살아가는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의미”는 필요 없다. 달리 말하면 “도”, 자연법칙에 따라 나 바퀴벌레에게는 저절로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니, 나는 자연에 따른다. 바퀴벌레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원만하며 대도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하물며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 나비 한 마리는 아름답고 자유로워 사람을 매료시키는데, 살아 숨 쉬는 사람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자본주의는 두 손만 고용하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 사람 전체를 고용해야 한다. 이는 시대의 모순이 개인에게까지 뻗어 나온 것이다.
사람은 “무의미”라는 업장에 시달리기에 “의미”에 매달린다. “자신감 부족, 자기 공격”에 시달리기에 “자신감”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실존주의 심리학과 도가·선종의 치유에는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다. “무조건적인 존재”, “무조건적인 자신감”, “무조건적인 자유로움”, “무조건적인 본래의 온전함, 본래 나 자신의 원만함, 본래 나 자신의 고요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퀴벌레론”으로 이에 답할 수 있다. “도는 똥과 오줌에도 있다”와 비슷한 관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업장 속에서 길을 잃고 바깥에서 구하기 때문에 명문대, 창업 성공, 명예와 이익과 권세 같은 “조건부 자신감”을 필요로 한다. 즉 마윈, 레이쥔,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만이 자신감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갈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레이쥔 역시 반드시 자신감이 넘치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잡스도 성장하고 깨닫는 과정을 거쳤고, 마윈의 사정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니 소시민들은 자신이 아직 한참 멀었다고 더욱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소시민의 업장
“바깥에서 구하기 대 안에서 찾기”라는 고전적인 과제 외에도 중요한 업장이 하나 더 있다. 소시민적 엘리트주의, 곧 “수행자 소아”다. “수행의 성취”를 일종의 “엘리트, 고수”의 경지로 여기는 것으로, 여전히 “문제 풀이에 능한 사람의 노력 중심 사고방식”이다. (앞선 글 《새로운 소아의 탄생: 수행자 소아》, 《소시민적 괴로움》)
그 때문에 “도”와 “선”을 신비화하고 대단하고 고상한 것으로 만든다. 선종에서 혜능이 “글을 모른다”는 점과 “자성이 본래 온전함을 갖추고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를 강조하는 것 역시 “가장 낮은 사람에게 가장 높은 지혜가 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바깥에서 구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마조선에서부터 “평범하게 별일 없이 지내는 것이 곧 선이며, 어디에나 선이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앞선 글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 개념 발전사》)
그리고 장자는 첫째로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둘째로 노력론에 반대한다. (앞선 글 《장자와 마르크스주의의 유사점과 공통점》,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노력에 관한 특별 토론: 이제 노력을 멈추자》)
장자 역시 노동 인민과 가까웠다. 장자는 “칠원 관리”였으며, 대지식인이자 몰락한 귀족이자 국영기업의 말단 간부였다. 칠원에서 접한 것은 줄, 톱, 대패, 송곳 같은 도구와 목수, 조각공, 칠공, 포정 같은 이들이었다. 노동 인민에게 재교육을 받고 그들의 소박함과 참됨, 선함, 아름다움에 감화되었으니, 자신이 접하던 퇴폐적인 옛 귀족이나 지식인, 나아가 전통적인 도가 인사들과는 달랐다. 이는 “소외”의 철학에 대한 그의 이해를 더욱 깊게 했고, “지식에 노예가 되는 것”을 비판하며 “일에 얽매여 부림을 당하지 않음”과 “쓸모없음의 쓸모”를 이해하게 했다.
하층계급이 더 진보적이고 상층계급이 더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장자와 마르크스주의의 유사점과 가까운 점》을 쓴 것이지, 억지로 짜 맞춘 것이 아니다. 장자는 에피쿠로스와 살았던 시대도, 사상의 핵심도 가깝다. 그리고 에피쿠로스는 바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다. 첸무는 장자와 에피쿠로스를 비교했고, 궈모뤄는 장자와 스피노자를 비교했다. 이 두 사람은 적어도 나보다는 “엘리트”이지 않은가. (앞선 글 《장자 철학과 후기 그리스 철학의 유사점과 공통점(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 견유주의)》, 《장자와 에피쿠로스, 마르크스, 첸무, 그리고 나》)
삼、부족함과 원만함
장자는 늘 장애인의 사례로 이치를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장애인은 신체, “운명”, 직업, 나아가 결혼 등의 측면에서는 “결여”가 있지만, 그렇다고 영혼과 행복, 즐거움, 정신의 원만함이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애 덕분에 목숨을 보전하고(“새옹이 말을 얻다”), 소외되지 않으며(귀족들은 관직과 권력에 집착한다), 마음 편히 자신의 기술에 전념할 수도 있다. 당 현종의 아들 이모는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잔혹한 정치투쟁을 피하고 수왕에 봉해졌다. 이것이 장자 학설의 “바깥에서 구하지 말고, 본래의 온전함을 지니며, 주어진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흐름에 따르라”는 것이다.
사、본래의 온전함
혜능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감탄했다. 자성이 본래 온전함을 갖추고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장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퀴벌레가 본래 온전함을 갖추고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만물은 동등하며 함께 생겨나는구나. 모든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존재하며, 자신감과 자연스러움, 원만함, 본래의 온전함을 지닌다. 모든 아기가 편안히 잠들고 미소 짓는 것처럼.
인류의 1만 년 역사를 보라. “문제”가 있는 것은 세계이지, 인류가 원만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1만 년이 더 지난 뒤 돌아보면 지금 역시 인류 문명의 초기일 것이다. 인류가 그 속에서 발버둥 치며 서로 죽이고 싸운다고 해서 “인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유물론, 어쩔 수 없음과 무위. (앞선 글 《개인의 문제는 흔히 인류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