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업장 시리즈

동아시아 가정에 널리 존재하는 은밀한 공격

정신역동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간접적 공격이다. 사람은 분노하며,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억압되었다가 자신을 향하거나 타인을 향한 간접적 공격으로 나타날 뿐이다. 억압은 프로이트 사상의 핵심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는 남자는 냉담하게 회피하고, 여자는 냄비와 그릇을 집어 던지는 경우가 있다. 말로 드러나는 냉담함, 남과의 비교, 회피, 폄하, 정서적 냉대 등도 있다. 더 복잡한 형태도 있다. 이를테면 과도하고 자기학대적인 헌신을 통해 타인을 도덕적으로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간접적 공격의 뿌리는 동아시아 가족의 봉건적 위계질서다. 남성 권력, 가부장적 권력(시어머니도 포함된다), 도덕을 앞세운 강요다. 억압은 많고 사랑은 적다. 약하고 의존적이며 지위가 낮은 쪽은 분노를 느끼지만,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는 없다(권력도, 사랑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술’이 아닌 ‘폭력적 소통’이다.

그래서 간접적 공격은 고부 관계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 첫째, 가부장적 권력(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을 향한 공격인데, 시어머니 역시 약자다. 둘째, 부모 세대가 늙고 권력을 잃으면서 동아시아 가족의 권력 중심이 이동하고, 새로운 시어머니가 부상한다. 황후와 태후의 다툼이다.

형제자매나 형수·올케·동서 등 같은 세대 사이에서도 이런 간접적 공격은 흔하다. 같은 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경쟁, 또래 압력, 질시 등의 요인 외에도 또 다른 층위가 있다. 부모와 집안 어른들에 대한 원망을 풀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동아시아의 맹목적 충성과 효도를 강요하는 도덕적 압박 때문이고, 둘째는 부모의 몸과 마음, 자기가 약해서 공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정신분석적 차원에서). 그래서 그 공격이 같은 세대나 아랫세대로 향한다.

간접적 공격에는 공격의 대상을 옮기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 따라서 많은 가족 문제의 뿌리에는 무책임하고, 자취를 감추거나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며, 취약하고 뒤틀린 중심인물, 가장, 아버지가 있다.

정신질환의 흔한 뿌리 중 하나는 ‘아이가 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는 것’이다. 부모의 과제에 개입하여 부모를 구하고 가족을 구하려 한다. 원가족의 불안정함과 불안, 부모의 문제로 인해 아이의 미성숙한 전능적 자기애와 깊은 사랑이 뒤틀려, 감당하기 어려운 초인적 구원 욕구가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헬링거가 말한 가족 질서의 뒤바뀜이다.

A. 원가족의 ‘심리치료사’가 되려 한다. 하지만 심리치료사는 하기 어려운 일이며, 직업상 상처를 입기도 한다. 하물며 미성년자가 협조하지 않는 중장년층을 상대하는 경우는 어떻겠는가.

B. 원가족에서 마냥 좋은 사람, 갈등을 겉으로만 봉합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겉으로나마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자신을 억압하면서 스스로도 간접적 공격과 자기 공격을 하게 될 뿐 아니라, 압력을 빼주는 배출구이자 화풀이 대상이 된다. 수많은 간접적 공격이 이 좋은 사람에게 향한다. 그 사람이 강할수록 그에게 전가되는 공격성도 강해지고, 결국 직접적 공격으로까지 바뀐다. 장원의 대사처럼, “좋은 사람은 총구가 겨눠지는 처지가 되어야 하는 거야.” 모순과 갈등이 겹겹이 쌓인 중국식 가족 안에서 중재자가 되려 하는 것(20~28세 청년에게 흔하다)은 유치함, 어리석음, 자만심, 구원 콤플렉스, 역할의 전도(자신을 부모로 여기는 것)다. 또한 각 당사자의 깊은 바람과 원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모두의 집중포화를 맞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화풀이 대상이던 이 좋은 사람이 폭발하고 나면, 가족의 겉보기 화목함을 더는 아무도 봉합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으로 살겠다는 꿈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꿈은 깨진다. 하지만 그 좋은 사람이 빠진 원가족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다.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고, 이 가족 역시 자연스럽게 해체되어 간다.

원가족 구성원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받으면 마음이 아프고 거리를 두게 된다. 하지만 정신역동학을 이해한 뒤 내가 얻은, 잘 알려지지 않은 위안이 있다. 첫째, 상대가 감히 공격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기가 좋든 나쁘든 어쨌든 더는 약하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둘째, 내가 충분히 괜찮고, 다른 사람 눈에 충분히 튼튼해 보인다는 뜻이다. 참 역설적이지만 말이다.

이미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첫째,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누구도 구하려 하지 말고, 타인의 운명을 존중하며, 타인의 과제와 인과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끊고, 버리고, 떠나라. 거리를 두어라. 둘째, 용기를 내어 분노를 표현해야 한다. 진실함은 언제나 옳으며, 진실한 피드백은 양쪽 모두에게 이롭다. 참고 억누르면 간접적 공격으로 이어질 뿐이다. 남도 자신도 다치게 하는 칠상권이다. 셋째, 마냥 좋은 사람이나 갈등을 겉으로만 봉합하는 사람은 단호히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어리석음이자 자살이다.

아직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고, 가정을 꾸리거나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사랑과 존중, 성숙함이 없다면 시대의 거센 물결에 대처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