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어두운 면을 끌어안는 법
어두운 면을 끌어안는 법
어두운 면을 끌어안는 법
어두운 면을 끌어안는 것은 심리와 마음의 영역에서 중요한 과제다.
어두운 면이란 우리가 두려워하고, 배척하고, 맞서고, 도피하고, 미루는 측면이다. 내면의 작은 자아, 감정, 트라우마, 방어, 집착, 업장이다. (앞선 글 《업장 특집》)
一、두 사람
- 융은 이 주제로 유명하다.
앞선 글 《‘나’의 구조: ‘실제적 나’가 리비도와 함께하기》에서는 융의 체계와 비교했다. 융의 치유와 성장 경로는 자아(ego)가 콤플렉스, 그림자, 하위 인격, 인격의 파편 등(업장)을 통합하려고 ‘노력’하면서 점차 자기(self, 원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나는 융이 스피노자(융 자신이 언급했다) 등의 독일 객관적 관념론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자기’ 개념은 스피노자의 자연의 동일성, 셸링의 절대적 동일성, 도가의 ‘도’와 비슷하며,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융이 도가 철학을 좋아한 것은 자연스럽다.
최근 몇 년 사이 나온 괜찮은 심리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도 어두운 면을 끌어안는 이야기를 한다. 열등감, 난처함, 거절당한 느낌, 낙담, 수치심을 느끼며 자신에게 이런 면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드름이 난 열네 살 소년 같은 모습이다.
이 체계는 비교적 실천하기 쉽고 구체적이다. 다만 ‘누구나 본래의 온전함을 지니고 있으며, 닦을 것도 증명할 깨달음도 없다’는 인본주의, 장자와 선종의 체계와는 분명 다르다. ‘노력’, ‘내면아이 치유’ 같은 흔한 심리학 개념은 내가 동의하는 관점이 아니다. 앞선 글: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자연에 맡기고, 힘을 들이면 어긋난다》, 《새로운 작은 자아의 탄생, 수행자의 작은 자아》, 《‘내면아이’가 나를 치유한다》 - 길리건
앞선 글 《길리건 심리학: 도가 계열의 심리학》
스티븐 길리건은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 박사이자 에릭슨의 제자다. 길리건의 심리학은 현재 나와 가장 가까운 학파다. 그 자신도 도가 철학을 무척 좋아하며, 나 역시 그의 학파가 장자 심리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요 체계는 다음과 같다.
a. 본래의 온전함; 《보통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온전함을 느낄 수 있을까》,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 개념 발전 소사》, 《인본주의 VS 마르크스주의》
b. 자기-타인-세계의 깊은 연결, 일종의 심오한 실존적 경험; 《보통 사람의 심리적 성장: 심리적 경계와 자기대상 관계 이론, 대상관계 이론》
c. 표층의 언어적 사고 VS 심층의 마음; 앞선 글 《장자의 제물론과 마르크스: 표층의 언어적 사고에서 심층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d. 자연에 맡기기(본래의 온전함+깊은 연결+심층의 마음->자연에 맡기기). 긴장을 풀고 원초아가 자연스럽게 치유하도록 두기. 원초아는 스스로 실제적 나를 치유한다. 실제적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항하지 않고, 쓸데없이 애쓰지 않는 것이다.
e. 어두운 면 끌어안기: 일본의 모리타 요법에서 말하는 ‘고통은 자연에 맡기고, 일상에서는 해야 할 일을 한다’도 비교적 도가적이고 실천적인 표현이다.
f. 수용: 받아들이고,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며, 무능과 무위로 자연과 운명에 맞서기보다 따른다. 받아들이고, 긴장을 풀고, 원초아와 마음의 힘/리비도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한다.
종합하면, 이 체계는 분명 본래의 온전함과 내면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치유한다는 데 바탕을 두며, 닦을 것도 증명할 깨달음도 없다는 체계다. 장자, 선종, 인본주의에 더 가깝다. 실제적 나의 의식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긴장을 풀고 맞서지 않는 것이다. 융식의 ‘노력’, ‘내면아이 치유’ 체계와는 다르다.
二、무엇을 끌어안을 것인가
(一)회피
어두운 면은 회피에서 비롯된다. 한편으로는 도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삶에 대한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자신의 마음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 반대편에는 우리에게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규율이 있다. 사람들을 흔히 발끈하게 하는 말이 있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사회화, 대상화, 도구화, 물화, 소외는 다채로운 내면의 과제와 감정, 상태의 변동을 깎아내리고 ‘안정된 감정’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이전에 《감정은 허구의 개념이다. 인격이 안정되면 감정은 자연스럽다》, 《정신분석은 사람들이 평범한 삶 속의 시적 정취, 신성함, 크툴루를 보게 한다》를 썼다.
회피를 끌어안는 과제는 감정을 끌어안고, 잡념을 끌어안고, 업장을 끌어안는 것이다(《수행자의 작은 자아》). 내가 ‘리비도’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면의 감정, 변동, 업장, 동력에 이름을 붙이고 복잡한 내면과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우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교양교육과 심리학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감정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 감정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분노에는 흔히 낙인이 찍히지만, 분노는 아주 건강하고 정상적이며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감정이다. 분노를 억누르면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다루는 여러 접근에서는 수용, 허용, 끌어안기를 강조한다. 헬링거의 《나는 허용한다》가 그런 예다.
잡념과 업장을 끌어안는 것은 ‘수행’의 중요한 개념이다. 많은 수행자는 자신에게 잡념과 업장이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이것 자체가 업장이다. 깨달음이란 마음이 본래 고요하고, 업장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져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장자: “지인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아, 떠나는 것을 붙잡지 않고 오는 것을 맞으러 나가지 않으며, 응하되 담아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을 감당하면서도 상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깨달음을 얻은 뒤 두 번째 해》, 《새로운 심리적 성장 단계와 욕구 모델—매슬로 욕구 위계의 수정》에서 이렇게 썼다. 많은 사람은 깨달음을 신비화하여, 깨닫고 나면 노승이 선정에 들듯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거나, 전지전능해져 돌을 금으로 바꾸고 하늘을 날고 땅속을 다니게 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은 깨달음이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구름이 많아도 햇살은 여전히 밝다.
사실 루쉰, 쑤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떠올려보면 된다. 그들에게 번뇌와 혼란, 곤궁함,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때가 없었겠는가. 그렇다고 그들을 깨달은 사람이라 부를 수 없겠는가. 루쉰의 글은 분노에 차 있고 비장하지만, 그의 내면은 고요하다.
(二)불안 끌어안기
불안은 나쁜 것이 아니고, 도피는 좋은 것이며, 미루기는 문제가 아니다.
PC방, 게임, 애니메이션·만화 문화, 숏폼 영상이 중국의 젊은 세대 하나를 망칠 것이라는 말을 늘 듣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도피’는 위니컷이 말한 ‘전이 공간’, 나아가 안아주는 환경의 역할을 했다. 서른다섯 살에 돌아보면, PC방에서 보낸 날들은 압박이 심했던 청소년 시절에 드물게 누릴 수 있었던 숨 돌릴 틈이자 정신적 공간이었다. 십수억 명이 삶 속에서 분투하면서도 소박한 진선미를 지키는 모습을 보면 본래의 온전함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 《보통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온전함을 느낄 수 있을까》
불안은 왜 좋은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불안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신호다. 《사교 관계에서의 선별》, 《그 시절,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며 내게 문제가 있다고 하던 사람들이 나를 문제 있게 만들었다》
미루는 것은 마음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공격은 마음의 힘을 더욱 손상시킨다. 그래서 《미루기 증상은 허구의 개념이다》를 썼다. 많은 미루기는 사실 리비도가 이미 판단과 결정을 내렸는데 의식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불안은 그저 인정하고, 부정하거나 매도하지 않으면 된다. 도피하든 정면으로 마주하든 모두 좋다. 기운이 있으면 마주하고, 기운이 부족하면 드러누워 쉬면 된다.
(三)수치심과 죄책감 끌어안기
a. 외적 측면: 범죄, 도덕, 신분
《쇼생크 탈출》은 마음의 탈옥뿐 아니라 속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앤디는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한다. 어쨌든 충동적으로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러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속죄했다고 느낄 때까지 마음을 다잡고 복역한다. 자신을 풀어주는 것은 중요하다.
도덕적 죄책감 중에는 실제로 부도덕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 여론에 맞지 않아 생긴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지금은 1980년대생부터 1990년대생, 2000년대생까지 원가족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윤리에서는 대역무도한 일이지만, 이는 건강하고 인간을 중심에 두는 태도다.
b. 내적 측면: CPTSD, 유독성 수치심; 사회적 규율
수치심=트라우마
CPTSD는 내가 심리학 추천 도서 목록에서 꼭 알아보기를 권한 개념이다. 아동·청소년기의 복합적인 트라우마에 관한 것으로, 스무 살에서 서른다섯 살 사이에 흔히 중요한 주제가 된다.
수치심은 사람들이 오해하듯 평범한 감정이 아니라 심각한 트라우마다. 수치심=트라우마. 게다가 심각도가 높은 부류의 트라우마로, 해리에 가까우며 자기의 핵심이 무너지는 유형의 현상이다. 극단적이고 알기 쉽게 말하자면, 정말 건강한 사람에게는 수치심이 없다. 즉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은 많은 경우 트라우마가 재발한 것이다.
《자기 공격, 자기 의심, 유독성 수치심의 뿌리는 무엇인가》에서는 유독성 수치심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논의했다.
코헛-자기심리학:
자기애적 상처로 자기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두 가지 방어가 생긴다. a. 과대 자기(과도한 자기애처럼 수치심을 가림); b. 자기애적 우울(“나는 아무 가치도 없다”는 수치심에 빠짐).
우선 깊은 고통을 경험하고, 이어서 연쇄적인 결과와 여러 방어기제가 나타난다. 위축, 자기 공격과 자기 파괴, 자기 의심과 미루는 완벽주의, 거짓 우월감이다. 장기간의 수치심은 정서적 해리로 이어질 수 있다.
위니컷-대상관계 학파:
충분한 반영이 없으면 아이는 참된 자기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거짓 자기’를 만들어낸다. 이는 타인에게 맞추며 진짜 모습을 감추는 생존 전략으로, 그 핵심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수치심이 있다. 유독한 초자아: 내면화되어 지속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초자아다. 완벽하지 않으면 수모를 당해 마땅하다고 여기며, 작은 실수에도 강한 수치심을 느낀다.
수치심은 사회에서도 자주 비롯된다. a. 투사적 동일시와 수치심의 세대 간 전승: 양육자가 자신의 수치심을 소화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투사한다. “넌 정말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아이는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이 격렬한 수치심을 내면화한다. b. 사회 권력구조의 억압적 내면화: 주변화된 집단과 구조적 수치심이다. 분뇨 수거 노동자나 성소수자 집단이 느끼는 수치심이 그 예다.
《세상 사람은 모두 괴롭다: ‘깊은 붕괴, 깊은 고통’을 이야기하며, “운명은 왜 하필 내게 이렇게 가혹한가”라는 독자의 질문에 답하다》: 심리학의 방어기제는 더 심각한 붕괴를 막기 위한 것이다. 깊은 문제의 본질은 두려움, 슬픔, 수치심이며, 불안과 우울보다 더 깊은 층위에 있다. - 평범함과 실존적 위기 끌어안기
평범함을 끌어안는 것은 업장을 끌어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와 마음의 영역에서 높은 수준의 개념이다.
범용한 사람은 범용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범용함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담담하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범용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실존적 위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많은 진실을 마주할 힘과 용기가 없다. 이를테면 고독, 친구가 없다는 사실, 책임, 죽음 등이다. 그래서 어빈 얄롬의 죽음 철학은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서른 살 무렵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나아가 자신의 범용함을 받아들이면서 도가 철학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끝내 회피하며 헛되이 애쓰고, 존재감과 우월감을 찾는다.
앞선 글 《범용함 받아들이기》:
범용함은 한때 내가 마주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1. 바깥에서 답을 구하느라 범용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2. ‘주변 사람들’이 범용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3. 구직 과정에서는 범용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4. 실존적 위기 때문에 범용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5. 온갖 작은 자아의 집착, 에고가 범용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전에 자식과 조카뻘 아이들의 평범함과 범용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역시 내면의 불안이 투사된 것이었다.
범용함은 좋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다. 무지한 사람들이 통속적인 태도로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전술이 전략이 되고, 통속성이 핵심이 되어버리면 끝장이다. 남은 반생을 평범하되 범용하지 않은 쪽으로 노력하며 살아가려는 것만으로도 나는 철이 든 셈이다.
범용함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대자연의 평범한 사물 하나이자 평범한 존재로, 자연스럽게 왔다가 자연스럽게 간다.
a. 평범한 사람이되 스스로 번민을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평범하되 범용하지 않은 것이다.
b. 나는 하늘에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
c. 내게는 어떤 임무도 없다. 나는 일부러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저 아주 범용한 사람으로, 줄곧 운명에 떠밀려왔다. 차분해져서 더는 무턱대고 발버둥 치지 않을 때 비로소 운명의 강물을 즐길 수 있다.
d. 내게는 어떤 죄도 없고,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