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자기와 심리학 시리즈

세상 사람은 모두 괴롭다—깊은 붕괴와 고통을 이야기하며, ‘운명은 왜 유독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가’라는 질문에 답하다

一、깊은 붕괴, 깊은 고통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는 더 심각한 붕괴를 막기 위한 것이다.

자만과 나르시시즘은 열등감을 막기 위한 것이다. 투사, 부정, 반동형성, 합리화 등은 받아들이고 담아낼 힘이 부족해서 진실을 피하려는 것이다. 자신과 관계에 관한 진실, 사나운 적의, 증오, 파괴욕, 탐욕·분노·어리석음, 화 같은 것들이다. 해리, 격리, 퇴행, 보상 등은 트라우마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표층의 심리 문제->심층의 역동적 문제, 자기의 붕괴; 표층의 업장->심층의 업장.

마음의 바탕에는 본래의 온전함이 있고, 마음의 심층은 산산이 부서져 마기가 부딪쳐 날뛰며, 마음의 표층은 요동치고 일그러진다.

심층 문제의 본질은 두려움, 슬픔, 수치심으로, 불안과 우울보다 더 깊은 층에 있다.

사람은 겹겹의 업장을 짊어진 채 소외된 사회, 명리와 세속적 이해관계가 판치는 곳에서 분투해야 하니, 온갖 마귀가 더욱 어지럽게 날뛴다.

고요히, 본연의 내가 평온 속에서 마음의 마귀와 업장을 치유하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마르크스와 장자는 각각 역사적 유물론과 운명이라는 두 관점에서 세상 사람 모두가 고통받는 까닭을 분석하고,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며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二、운명은 왜 하필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가

한 누리꾼이 물었다.

여러분도 이런 단계를 겪어보셨나요? 과거의 경험이 불만스럽고,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했느냐고 운명을 추궁하게 됩니다. 운명이 나를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니 나도 나 자신을 더 가혹하게 대하겠다며, 자신을 더 공격하고 더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이 단계에서 맴돌고 있는데,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조언해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1.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내면의 핵심 문제다. 이것은 “겪어본 적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당신도 심리학이 낯설지는 않을 텐데, 열등감과 수치심 같은 과제는 누구에게나 있고,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과거를 곱씹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부분적으로는 이 문제를 말한다. 앞부분의 글을 쓰면서 얼마 전에 쓴 「자기 공격, 자기 의심, 유독성 수치심의 뿌리는 무엇인가」를 다시 펼쳐 참고하기도 했다. 검색해서 유독성 수치심 부분을 읽어봐도 좋겠다. 유독성 수치심은 깊은 층의 트라우마로,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수치스러워하며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열등감도 비슷하다. 자신이 하찮고 무력하다는 느낌, 지배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그런 공포다.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은 아주 깊은 곳의 핵심, 자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머릿속의 생각과 정보는 이런 깊은 감정이 말로 표현된 것일 뿐이며, 거기에는 소아의 마음속 마귀도 많이 뒤섞여 있다. “운명은 왜 하필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가”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깊은 감정이다. 단순히 글을 읽고 깨닫거나, 논쟁이나 철학, 위로의 말로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에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 좋지 않은 사람과 일에 대하여」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처럼 운명의 불공평함에 답하는 듯한 말도 사실 사람을 납득시키고 치유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치유된 뒤에 돌아보며 얻는 깨달음에 더 가깝다.

  1. 내면의 핵심에 속하는 것은 모두 조용히 쉬며 돌볼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 잘 살아가면서 본연의 내가 평온하게 쉬고 스스로 치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쓴 글의 핵심이다. 전에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진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심리 전문가를 찾아가 치료를 받고 그 효과가 어떠할지는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결과와 진행 속도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야 한다.
  1.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울 때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자기 팔자는 형편없다고 느끼고, 자신이 너무 못났다며 스스로를 공격한다. 성숙해진 뒤에는 실제로 눈에 띄게 많이 나아지고, 과거도 더 잘 받아들이게 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할 말이 많아 한두 마디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중 하나는 내면의 핵심이 차츰 안정되고 고요해지면서 바깥에서 구하는 것이 줄어들고, 현재를 살아가기 속에서 소박한 진선미와 행복, 기쁨을 좀 더 느끼다 보면 이만하면 좋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운명이 나를 나쁘게 대한다고 느끼는 일도 줄어든다. 도가 철학에서는 천지가 인자하지 않으며, 일부러 누군가를 겨냥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1. 누구에게나 이런 문제가 있음을 알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중생을 본다”는 것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어떤 홀가분함을 느끼는 것도 포함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며 얻는 치유란, 그토록 많은 선한 사람과 위인이 겪은 고난과 그들이 치른 희생을 보며 감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천지를 보고, 자신을 보고, 중생을 본다. 나도 집착도 없고, 능력을 내세우지도 억지로 행하지도 않으며, 욕망도 구함도 없고, 근심도 걱정도 없다.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운명에 순응하며,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긴다. 「장자가 논하는,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라는 글은 공자가 운명 속에서 겪은 곤경을 통해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는 내면의 핵심을 치유하기 위한 이야기는 아니며, 다만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사실 결국은 해야 할 일을 하라는 말이다. 일본의 모리타 요법에서도 고통은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한다.

한 누리꾼이 이렇게 썼다. 수영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을 빼면 물은 나를 받쳐준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아가기만 할 수 있다면 세상도 나를 받쳐줄 것이다. 내가 긴장하면 내 근육이 아프다. 지금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면, 아프고 뒤틀리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다. 고맙다. 이제 알겠다.

우리는 흔히 긴장하고 몸과 마음이 꼬인 채 무작정 힘을 쓴다. 본래의 온전함과 본연의 나의 평온함에 대한 믿음, 아무 조건 없이 괜찮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서른에서 서른다섯 살에 이르는 시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안정을 찾는 일이다. 물이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아 사람이 빠져 죽을 깊이가 아니며,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앞서 쓴 「불안하면 온갖 마귀가 생기고, 마음이 편안하면 온갖 길이 열린다」가 바로 이 이야기다. 내면의 허둥거림과 밖으로 드러나는 마구 버둥거림이 사람을 물에 빠져 죽게 한다. 세상이 나를 받쳐줄 것이라는 생각은 수영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멋진 깨달음 중 하나일 것이다. 수영을 비롯한 모든 운동은 사람이 이완과 긴장을 알아차리도록 돕는다. 물은 순응하는 법도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