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제물론」: 말은 무의미하니 나를 잊고 만물을 동등하게 보며 자연에 맡겨라
장자 제물론: 말은 무의미하다, 나를 잊고 만물을 하나로 보며 자연에 따르라
말은 무의미하고 논쟁도 무의미하다. 헛되이 정력을 소모하고 수양의 수준을 드러낼 뿐이다.
첫째, 행하고 말하지 말라. 실천과 실제 행적에 의미가 있다. 세상과 사람의 마음은 말로 바뀌지 않으니, 굳이 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세계의 역사도 유물론적이고, 사람의 마음도 유물론적이다.
둘째, 말은 협력을 위해 쓰는 것이지 다투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같은 파장으로 협력하는 예로는 교향악단이 있다. 같은 파장으로 돕는 예로는 코치가 운동선수를 지도하는 일이 있다. 코치는 수준이 높고 향상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파장이 맞는 운동선수에게만 도움이 된다.
셋째, 다툼. 작은 자아가 집착을 놓고 다투는 것이며, 사람들의 심리적 방어 사이의 다툼으로, 이성과는 관계가 없다.
넷째,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을 더 잘 이해한다. 말이 이토록 값싸면서도 힘이 드는데, 지혜로운 사람이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섯째,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한다. 많은 사람이 늘 지도자, 구세주,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 인도하는 사람, 설득하는 사람 등이 되고 싶어 한다.
여섯째, 선전과 교화는 엘리트주의적인 허구의 개념이다. 마르크스주의 자료에서도 이런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선전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이는 오해다. 먼저 혁명적 대중이 있어야 그런 말에도 수요가 생긴다. 혁명적 대중이 없다면 레닌이 오스트리아에서 아무리 현란하게 말해도 효과가 없다. 푸른 하늘이 이미 죽은 상황이 아니라면,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마땅히 서야 한다”라고 외친들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선집을 인터넷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왜 믿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가? 심리학 명저가 널려 있는데, 사람의 마음은 왜 여전히 고통스러운가.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글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의 말이야 어떻겠는가.
『장자』의 두 번째 편인 「제물론」은 인간 인식의 유한성과 편향성을 이야기한다. 사람은 작은 자아를 초월하고 큰 도에 순응하여, 하늘과 인간과 만물이 하나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래 글은 대부분 천구잉의 『장자금주금역』에서 발췌했다.)
제1장은 “나는 나를 잃었다”를 말하며, 집착과 선입견을 버리는 것을 다룬다. 세 가지 소리는 서로 다른 시야에서의 인식이다. 제2장과 제3장에서 말하는 백가쟁명은 사실 눈먼 사람들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아서, 저마다 집착하는 바가 있고 작은 자아들이 다투며 감정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서 “밝음으로 비추기”를 제시한다. 사물과 인식은 모두 변화해 가므로 집착해서는 안 되며, 자연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변증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4장은 도를 통해 하나로 통한다는 내용이다. 눈먼 사람이 만진 코끼리는 우주의 전체가 아니다. 제5장은 “하늘과 땅은 나와 함께 생겨나고, 만물은 나와 하나다”라고 말한다. 제6장은 세 가지 우화를 예로 든다. 마지막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들어, 작은 자아의 상실을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땅의 소리란 대지가 숨을 내쉬는 것이며, 그 이름이 바람이다.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성난 듯 울부짖는다. 마르크스주의의 말로 표현하면, 자본주의의 이 단계에서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처지와 인식, 입장을 지닌다. 마치 서로 다른 구멍이 거센 바람 속에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하늘의 소리는 도의 소리이며, 큰 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큰 지혜는 너그럽고 여유로우며, 작은 지혜는 자잘하게 따진다. 큰 말은 기세가 맹렬하고, 작은 말은 재잘거리며 그치지 않는다.
큰 지혜는 넓고, 작은 지혜는 세밀하다. 큰 말은 기세로 남을 압도하고, 작은 말은 논쟁을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잠들었을 때도 정신이 뒤얽히고, 깨어 있을 때도 몸이 편치 않으며,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 복잡하게 얽혀 종일 서로 속이고 다툰다. 어떤 이는 말을 더디게 하고, 어떤 이는 말 속에 깊은 속셈을 감추며, 어떤 이는 용의주도하고 빈틈없이 말을 고른다. 작은 두려움에는 풀이 죽고, 큰 두려움에는 넋을 잃는다. 그들이 말을 할 때는 마치 날카로운 화살을 쏘듯, 남의 시비를 엿보며 공격하는 데 온 정신을 쏟는다. 말을 하지 않을 때는 마치 맹세라도 한 듯, 그저 묵묵히 승리할 기회를 기다린다. 그들이 쇠하는 모습은 가을과 겨울의 풍경이 시드는 것과 같으니, 이는 그들이 날마다 소멸해 간다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들어 생기를 되찾을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은 밧줄에 묶인 듯 막혀 있으니, 이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쇠해 간다는 말이다. 죽음의 길로 향하는 마음은 다시는 활기찬 생기를 되찾을 수 없다. 그들은 기뻐하다가 성내고, 슬퍼하다가 즐거워하며, 근심하다가 탄식하고, 변덕을 부리다가 두려워하며, 조급해하다가 방종하고, 날뛰다가 꾸며 댄다. 마치 속이 빈 악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땅의 기운이 피어올라 버섯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이런 온갖 심정이 밤낮으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교차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알지 못한다.
평생 분주하게 일하면서도 성과를 보지 못하고, 지치도록 수고하면서도 어디로 돌아갈지 알지 못하니, 슬프지 않은가!
그것들(온갖 심정)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그것들도 드러날 수 없다. 사람은 일단 형체를 부여받으면 참된 본성을 잃지 않은 채 타고난 수명을 다해야 하지만, 외물과 접촉하면서 서로 마찰하고 그 속에서 내달리며 뒤쫓기를 멈추지 못하니, 참으로 슬프지 않은가! 평생 바삐 일하면서도 이렇다 할 성취를 보지 못하고, 지치고 고달프면서도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니, 참으로 애달프지 않은가! 이런 인생은 비록 죽지 않는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의 몸은 점점 쇠하고 늙어 가며, 정신도 그 안에 갇혀 함께 소멸해 가니, 이보다 큰 슬픔이 있겠는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본래 이토록 어둡고 혼미한 것인가?
사람에게는 선입견이 있다. 도는 작은 성취에 가려지고, 말은 화려한 수사에 가려진다.
누구나 자신의 선입견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 “도”는 어떻게 가려져 참과 거짓의 구별이 생기는가? 도는 작은 성취에 가려지고, 말은 허황되고 화려한 말에 가려진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 사이에 시비를 가리는 논쟁이 생긴다. 그들은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한다. 그러기보다는 텅 비고 밝은 마음으로 사물의 본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편이 낫다. 밝음으로 비추는 것만 한 것이 없다.
변증법: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어느 것이나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 의지한다. 저것과 이것은 함께 생겨나니, 곧 변증법적으로 공존한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며, 막 생겨나면서 막 사라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물의 본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자연에 맡긴다. 성인은 어느 한쪽을 따르지 않고 자연에 비추어 본다. 저것과 이것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 곳이 바로 도의 지도리다. 도의 지도리에 들어맞아야 비로소 고리의 중심에 들어선 듯, 끝없는 변화에 순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밝음으로 비추는 것만 한 것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명칭과 형상, 시비, 인과, 성패, 이해득실에 얽매인다. 오직 통달한 사람만이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함을 알기에, 자신의 옳음을 내세워 쓰지 않고 일상적인 쓰임에 맡긴다. 〔논쟁하는 자들은〕 마음과 지혜를 다해 “일치”를 구하지만, 그것이 본래 같다는 사실을 모른다. 마치 원숭이들이 아침에 세 개를 받고 저녁에 네 개를 받는 일에 얽매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음과 그름을 조화시키고 자연의 균형 속에서 쉬니, 이를 두 길을 함께 행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작은 자아는 시비와 호오, 논쟁을 통한 정복에 얽매인다. 시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도가 이지러지는 까닭이다. 도가 이지러지는 것은 편애가 생기는 까닭이다.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것과 구별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려 한다. 밝힐 수 없는 것을 밝히려 하므로, 결국 “단단함과 흼”을 둘러싼 혼미 속에서 생을 마친다. (평생 “단단함과 흼”에 관한 논쟁에 얽매인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과시는 성인이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지식과 견해와 논변을〕 남에게 과시하지 않고, 각 사물 자체의 기능과 역할에 맡긴다. 이것을 “밝음으로 비추기”라고 한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함께 생겨나고, 만물은 나와 하나다. 이미 하나라면 또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그것을 하나라고 말했다면, 또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에 말이 더해져 둘이 되고, 그 둘에 하나가 더해져 셋이 된다. 여기서 계속 나아가면 계산에 능한 사람도 셀 수 없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기만 해도 셋에 이르는데,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간다면 어떻겠는가! 더 나아가지 말고, 있는 그대로 따를 뿐이다! (사람의 쓸데없는 말과 궤변, 공론은 끝없이 늘어날 수 있으니, 잠시 멈추자.)
도에는 본래 경계가 없고, 말에는 본래 고정된 기준이 없지만, 옳다고 내세우는 것 때문에 경계가 생긴다. 그 경계를 말해 보자. 왼쪽과 오른쪽이 있고, 분류와 의리가 있으며, 구분과 분별이 있고, 경쟁과 다툼이 있다. 이를 여덟 가지 양상이라 한다. 하늘과 땅, 사방의 바깥에 관해서 성인은 그 존재를 인정하되 논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방의 안에 관해서 성인은 논하되 평하지 않는다. 『춘추』에 담긴 세상을 다스리는 선왕들의 뜻에 관해서 성인은 평하되 논쟁하지 않는다.
성인은 온갖 사물의 이치를 말없이 체득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논쟁하며 앞다투어 과시한다. 그러므로 논쟁에는 반드시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큰 도는 이름 붙이지 않고, 큰 논변은 말하지 않으며, 큰 인은 인을 내세우지 않고, 큰 청렴은 겸양을 내보이지 않으며, 큰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도를 뚜렷이 드러내면 도가 아니게 되고, 말을 논변으로 펼치면 뜻에 미치지 못하며, 인을 일정한 형식으로 삼으면 이루지 못하고, 청렴이 지나치게 결백하면 믿음을 얻지 못하며, 용기가 남을 해치면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멈출 줄 아는 것이 지극한 경지다. 누가 말하지 않는 논변과 말로 나타내지 않는 도를 알겠는가? 이를 아는 이가 있다면, 그것을 자연의 창고라 한다. 부어 넣어도 차지 않고, 퍼내도 마르지 않으며,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으니, 이를 감추어진 빛이라 한다. —— 한 사람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경계에서 멈출 수 있다면, 그것이 지극한 경지다. 누가 언어를 쓰지 않는 논쟁과 말로 일컫지 않는 큰 도를 알 수 있겠는가? 이를 알 수 있다면 자연의 창고라 부를 만하다. 이곳은 아무리 부어 넣어도 넘치지 않고, 아무리 쏟아내도 마르지 않으며, 그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 이를 숨어 있는 밝음이라고 한다.
내가 말하는 ‘앎’이 ‘모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말하는 ‘모름’이 ‘앎’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그대에게 묻겠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거나 반신불수가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은 높은 나무에 오르면 두려워 불안해하지만, 원숭이도 그러한가? 이 세 종류의 동물 가운데 도대체 누구의 생활 습관이 올바른 기준에 맞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큰사슴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작은 뱀을 즐겨 먹고, 올빼미와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 네 종류의 동물 가운데 도대체 누구의 입맛이 올바른 기준에 맞는가? 편저는 암원숭이와 짝을 짓고, 큰사슴과 사슴은 교미하며, 미꾸라지와 물고기는 서로 어울린다. 모장과 서시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들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하늘 높이 날아가며, 사슴은 그들을 보면 재빨리 달아난다. 이 네 종류 가운데 도대체 어느 쪽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인의에 관한 논점과 시비를 가리는 길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으니, 내가 어찌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설결이 말했다. “그대는 이로움과 해로움을 돌아보지 않는데, 그렇다면 지인도 이로움과 해로움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왕예가 말했다. “아! 지인은 참으로 신묘하다! 산과 숲이 불타도 뜨겁게 느끼지 않고, 강이 얼어붙어도 춥게 느끼지 않으며, 천둥이 산악을 뒤흔들어도 해를 입지 않고, 광풍이 바닷물을 일으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지인은 구름의 기운을 타고 해와 달에 올라 사해 밖에서 노닌다. 삶과 죽음의 변화조차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해득실이라는 생각이야 어떻겠는가?” —— 구름의 기운을 타고 해와 달에 올라 사해 밖에서 노니니, 죽음과 삶도 자신을 바꾸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로움과 해로움의 실마리야 어떻겠는가.
성인은 세속의 일에 매달리지 않고, 이익을 좇지 않으며, 해로움을 피하지 않고, 구하기를 즐기지 않으며, 정해진 길에 얽매이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고,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으며, 속세의 먼지 밖에서 노닌다. 성인은 해와 달과 함께 밝게 빛나고, 우주를 품으며, 만물과 어우러져 한 몸을 이룬다. 시비가 뒤섞여도 묻지 않고 내버려 두며, 세속의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의 구별을 똑같이 본다.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오가지만, 성인은 꾸밈없는 순박함 속에서 편안히 지낸다. 그는 고금의 무수한 변화를 아울러 하나의 순수한 몸을 이룬다. 만물은 모두 같으며, 순수하고 꾸밈없는 가운데 서로를 품고 있다. “내가 어찌 삶을 탐하는 것이 미혹이 아님을 알겠는가?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타향을 떠돌며 고향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같지 않음을 알겠는가? 여희는 애 땅의 국경을 지키는 사람의 딸이었다. 진나라가 처음 그녀를 맞아들일 때는 울어서 옷이 흠뻑 젖었지만, 진나라 임금의 궁에 이르러 임금과 한 침상에서 자고 맛있는 생선과 고기를 함께 먹게 되자, 그제야 처음에 울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내가 어찌 죽은 뒤에 애초에 삶에 연연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알겠는가? “꿈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던 사람도 깨어난 뒤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만나 울 수 있고, 꿈에서 슬피 울던 사람도 깨어난 뒤에는 사냥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은 꿈속에 있을 때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때로는 꿈속에서 또 꿈을 꾸기도 하며, 깨어난 뒤에야 꿈이었다는 것을 안다. 오직 크게 깨어난 사람만이 사람의 일생이 한바탕 큰 꿈과 같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깨어 있다고 여기고, 무엇이든 안다고 여긴다. 임금이니 신하니 하는 것이 참으로 천박하기 그지없다! 내가 보기에 공구와 그대도 모두 꿈꾸고 있다. 내가 그대가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꿈꾸는 것이다. 이런 말을 기이한 말이라고 한다. 어쩌면 만세가 지난 뒤에야 이 이치를 깨닫는 위대한 성인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는 것처럼 평범한 일이다.
가령 나와 그대가 논쟁했다고 하자. 그대가 나를 이기고 내가 그대를 이기지 못했다면, 그대는 참으로 옳고 나는 참으로 그른가?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나는 참으로 옳은가?
변화하는 소리는 서로 대립하면서 이루어진다. 그것들이 서로 대립하지 않게 하려면 자연의 구분으로 조화시켜야 한다. 나의 말은 만물의 변화에 순응하여 한평생 유유히 노닌다. ‘자연의 구분’으로 온갖 시비를 조화시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이든 ‘옳음’이 있으면 ‘옳지 않음’이 있고, ‘그러함’이 있으면 ‘그러하지 않음’이 있다. ‘옳음’이 참으로 ‘옳음’이라면 ‘옳지 않음’과 구별되므로 논쟁할 필요가 없다. ‘그러함’이 참으로 ‘그러함’이라면 ‘그러하지 않음’과 구별되므로 이 역시 논쟁할 필요가 없다. 삶과 죽음, 세월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시비와 인의를 편안히 받아들이며, 무궁한 경계에서 노닌다면 무궁한 경계에 깃들 수 있다.”
그림자 바깥의 옅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움직이더니 이제는 멈추고, 조금 전에는 앉아 있더니 이제는 일어서는군. 자네는 어쩌면 그렇게 독립적인 의지가 없는가?”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일까? 내가 의지하는 것도 또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일까? 내가 의지하는 것은 뱀이 배 아래의 비늘과 껍질에 의지하고, 매미가 날개에 의지하는 것과 같을까? 내가 어찌 왜 이렇게 되는지 알겠는가! 왜 이렇게 되지 않는지 또 어찌 알겠는가!”
옛날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편안하여 장주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나니 몸이 굳은 듯 누워 있는 장주였다(뻣뻣함, 뻣뻣하게 누워 있음).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다. 이를 물화, 곧 사물의 변화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