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두운 에고, 알아차리는 사람 에고, 고수 에고
등잔 밑에 숨은 소아, 알아차리는 사람이라는 소아, 고수라는 소아
일、한 번의 경각심
많은 수행자는 자신의 ‘고수라는 소아’가 자신을 제약하여, 오히려 평범한 사람처럼 자신의 절망, 난처함, 막막함을 더 담담하게 마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평범한 사람은 흔히 자신을 지금 그럭저럭 살아가고, 소소한 행복도 조금은 누리지만, 자신의 경지가 부족하고 절망과 난처함과 막막함도 많은 평범한 사람으로 여긴다. 사실 이는 아주 좋은 상태이자 운명이며 경지다.
이、알아차림의 등잔 밑 어둠
많은 수행자는 ‘고수라는 소아’를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있다. 나도 가치투자, 도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모두 평범한 사람의 길이며, 바른길은 모두 자신의 한계, 무능, 평범함, 어리석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자주 쓴다.
반대로 이 몇몇 분야에는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 재야 철학자, 강호의 고수, 자유로운 은둔자도 자주 나타나며, 독선의 대가는 흔히 참혹하다. 앞서 나는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수행자라는 소아》, 《수행병과 엘리트주의》, 《장자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행하기》 등을 썼다.
이런 알아차림은 실제로 존재하며 긍정적이다. 다만 아직 더 깊은 알아차림으로 자라나지는 못했다.
‘고수라는 소아’는 바로 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소아’ 뒤에 숨어 있다.
마치 내가 누르스름하고 희미한 손전등으로 자신을 비출 때마다 ‘평범한 사람’만 보였던 것과 같다. ‘고수라는 소아’는 수정 뒤에 숨은 환영처럼 희미하고 흐릿했고, 나는 그것을 똑바로 보지 못했으며, 심지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등잔 밑 어둠의 무서운 점은 알아차림이 하나의 판에 박힌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아차리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고, 꿈속의 꿈에 빠져 있다.
알아차림이란 힘을 주는 순간 어긋난다.
삼、알아차리는 사람이라는 소아
‘알아차리는 사람이라는 소아’는 ‘수행자라는 소아’의 흔한 증상이다.
‘알아차림’은 강해지기 위한 수단, 능력, 감시 수단, 자기 검열 수단이 되고, 이어 교조주의, 나아가 관료주의적 방식, 즉 감시자에게 적당히 대응하는 방식으로 굳어진다. 스스로 금을 그어 자신을 가두는 셈이다.
자신이 ‘고수’라고 ‘알아차릴’ 때는 의기양양해한다.
자신이 절망 속에 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간단히 ‘알아차림을 잃었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몹시 화를 내고 불만을 품으며 자신을 공격한다.
조건 없이 고요하고 자유롭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사、내 ‘고수라는 소아’의 몇 가지 뿌리
- 마음의 힘을 심하게 소진하여 알아차릴 여력이 부족하다
나는 크고 어려운 결정을 많이 내렸고, 삶에는 많은 과제와 도전이 있으며,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회피한다.
자기애가 손상되어 방어기제가 필요하다. 자기가 불안정하여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다. - 수행자라는 소아
‘수행’ 단계에서는 고통에서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데 ‘중점’을 두고, 고요함과 자성의 변함없는 현존에 중점을 두기에, 고통과 업장을 배척하고 회피하고 경시하게 된다. ‘수행자라는 소아’ 자체가 절망 속의 희망이자 일종의 방어다.
알아차림이 판에 박힌 방식이 되어 버린 것, ‘알아차리는 사람’이라는 소아의 등잔 밑 어둠이다. - 생존 불안,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소아
능력과 쓸모의 문제다. 가치투자, 마르크스·레닌주의, 장자, 심리학은 모두 사회과학의 이론적 탐구에 속하며, 고수와 ‘쓸모’라는 문제에 얽혀 있다.
과제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소아, 공리를 좇는 사람이라는 소아: 남을 타이르는 사람, 설교하는 사람, 조언하는 사람,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 인연을 맺어 주는 사람이라는 소아
개인 미디어 운영자라는 소아: 겉모습, 꾸며 낸 상투적 인물상, 개인 미디어의 업력에 얽힘, 공리 추구
거시적 추세 분석과 거시적 불안, 이 두 과제는 그 자체로 깊이 얽혀 있다. - 세상 밖의 고수라는 소아
정신적 동질감을 원하는 욕구가 있고, 자기애적 동일시가 있으며, 고독의 문제, 연결 단절의 문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소아, 윈난에서 탕핑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독자 집단에서 비롯되는 투사적 동일시가 있다. - 마르크스·장자·심리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소아
학업과 일에는 늘 업장이 따라붙는다. 거대한 환희와 리비도의 고조가 자기애의 업장에 힘을 실어 준다. 지식 자본의 소외다. - 평범한 사람이라는 소아
나를 단순하게 추상화하고, 거기에 동일시하며, 그 형상에 집착한다. 내가 나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다’니, 나는 참 평범하지 않구나. - 가치투자자라는 소아, IT인이라는 소아
조건부 자신감과 자기 서사에서 비롯된다.
사、고수라는 소아의 폐해
- 진실과 현재, 내면의 절망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절망’이라는 고통은 ‘고수라는 소아’가 좌절하면서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오히려 2015년-2020년의 무지 속에서 몸부림치던 시기만도 못하다. 그때는 고통스럽고 초라하게 몸부림치는 자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2021년-2025년은 각성으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2026년부터는 각성 속에서 몸부림치는 시기다.
자신의 절망(질식감, 공포, 불안), 난처함(궁색함, 낭패, 몸부림, 잘못 인정하기), 막막함(평범함, 고독) 등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 현재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정도가 곧 자성을 알아차리는 정도다. 고수라는 소아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기, 현재를 살아가기, 온전히 자유롭게 존재하기를 가로막는다.
- 자기애, 방어, 은폐, 집착, 오만 등 소아가 낳는 일련의 결과, 그리고 타인의 업장과 얽힘
- 능력이 있고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집착
- 기타
오、‘절망, 난처함, 막막함’이 얼마나 큰일일까
평범한 사람이 자신이 절망하고 난처하고 막막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며, 오히려 좋게 보인다.
이것이 대체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 어두운 면이란 말인가.
하지만 소아의 업장 때문에 이 어두운 면을 감춘다. 평범한 사람을 향한 엘리트주의의 억압이다.
육、난처함은 오히려 긍정적이다
마그마 연작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여전히 업장과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쓴 것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소식도 고통으로 가득했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 내가 사람들을 연락처에서 삭제했다가 소수의 몇 사람을 다시 추가한 것은 한편으로는 진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의 실제 동요를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비웃기는커녕 오히려 나의 진실한 모습과 진심을 본다.
- 내가 다시 일자리를 찾고 있고 지금의 상태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더 이해하고 공감하기도 한다.
- 상담과 능력의 관점에서 나는 대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다. 노라의 가출, 고비에서의 탈옥, 오래 앓다 보니 의사가 된 경우처럼, 나는 해방자이며 업장과 알아차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챔피언스리그 감독이 아니라 아마추어팀 감독이다. 사람들이 알아차리도록 도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이 몇 세대의 사람들이 사대천왕의 류더화보다 황보, 왕바오창, 쉬즈성을 좋아하는 것 역시 평범한 사람의 진실함과 난처함, 시련을 겪으며 얻은 통찰 때문이다.
칠、과거의 나에게 감사한다
자성은 언제나 묵묵히 작동한다. 지금의 나에게도, 오늘의 자성에도 감사한다.
우리는 결국 진실을 똑똑히 보고,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