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장자 시리즈

장자·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다

一、장자: 사람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비추지 않고 고요히 멈춘 물에 자신을 비춘다

『장자·덕충부』의 첫머리에는 노나라 사람 왕태가 등장한다. 그는 “서 있어도 가르치지 않고, 앉아 있어도 논하지 않으며, 말 없는 가르침을 행했다.” 어떤 이치도 말하지 않고 그저 고요히 있을 뿐인데도 수많은 제자가 그를 따랐고, 공자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이 대목의 핵심은 “사람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비추지 않고 고요히 멈춘 물에 자신을 비춘다. 오직 고요히 멈춘 것만이 고요함을 구하는 뭇사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그의 덕행과 경지

원문:

죽음과 삶은 참으로 큰일이지만, 그것도 그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비록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무너지더라도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을 잃지 않는다. 의지할 것이 없는 이치를 분명히 알아 사물을 따라 옮겨 가지 않고, 사물의 변화에 맡기면서도 그 근본을 지킨다. 서로 다른 면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같은 면에서 보면 만물은 모두 하나다. 이와 같은 사람은 귀와 눈에 무엇이 알맞은지도 잊은 채, 덕이 조화를 이룬 경지에서 마음을 노닌다. 사물에서 하나인 면을 보고 잃어버린 면을 보지 않으니, 발 하나를 잃은 것도 흙덩이를 잃어버린 것처럼 여긴다.

번역:

죽음과 삶은 인생의 변화 가운데 큰일이지만, 죽음도 삶도 그를 따라 변하게 할 수는 없다.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무너져도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을 잃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이치를 깊이 알아 사물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고, 사물이 변하는 대로 두면서 자신의 근본을 지킨다.

사물의 천차만별한 면에서 보면, 한 몸 안에 이웃해 있는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사물이 모두 공통된 면을 지닌다는 관점에서 보면, 온갖 사물은 다시 모두 하나다. 이와 같은 사람은 귀와 눈에 어떤 소리와 빛깔이 가장 알맞은지조차 잊고, 형체와 감정을 잊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경지에서 마음이 자유롭게 노닐도록 한다. 외부 사물에서 하나인 면을 보고 상실로 인해 차이가 생긴 면은 보지 않으므로, 발 하나를 잃은 일도 흙덩이 하나를 잃어버린 것처럼 여긴다.

2.제자들은 왜 그를 따르는가?

원문:

사람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비추지 않고 고요히 멈춘 물에 자신을 비춘다. 오직 고요히 멈춘 것만이 고요함을 구하는 뭇사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땅에서 생명을 받은 것 가운데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푸르다. 하늘에서 생명을 받은 사람 가운데 오직 순임금만이 바르니, 다행히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하여 뭇사람의 삶을 바르게 할 수 있었다. 처음의 바탕을 온전히 지킨 징표는 두려움이 없다는 데 있다. 용사는 홀로 구군의 대군 속으로도 용맹하게 들어간다. 명예를 구하고자 자신을 다잡는 사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천지를 관장하고 만물을 품으며, 몸을 잠시 머무는 거처로 삼고 귀와 눈을 겉모습으로 여기며, 앎으로 아는 바를 하나로 통하고 마음이 한 번도 죽은 적 없는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는 장차 날을 골라 지극한 경지에 오를 것이며, 사람들은 그 때문에 그를 따를 것이다. 그가 어찌 외부의 일을 자기 일로 삼으려 하겠는가!

번역:

사람이 자신을 비추어 보려면 흐르는 수면이 아니라 고요히 멈춘 수면에 의지해야 한다. 고요함은 뭇사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온갖 나무가 모두 땅에서 생명을 받지만,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겨울이든 여름이든 무성하게 푸르다. 사람마다 모두 하늘에서 생명을 받지만, 우순만이 도덕과 품행이 가장 바르다. 다행히 이들은 모두 자신의 품행을 바르게 할 줄 알았으므로 다른 사람의 품행도 바르게 할 수 있었다. 본래의 바탕을 온전히 간직한 징표는 마음속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이 있다는 것이다. 용사는 홀몸으로도 수많은 군사 사이에서 용맹을 떨칠 수 있다. 명예와 이익을 좇으며 자신을 다잡는 사람도 이럴 수 있는데, 하물며 천지를 주재하고 만물을 품으며, 육체를 잠시 머무는 거처로, 귀와 눈을 겉모습으로 여기는 사람, 자연이 부여한 지혜로 깨닫는 이치를 터득하고 정신세계가 한 번도 쇠한 적 없는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는 틀림없이 좋은 날을 골라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를 것이며, 사람들은 그를 바짝 뒤따를 것이다. 그가 어찌 많은 제자를 모으는 일을 대단한 일로 여기겠는가!

二、수행하는 사람이 마에 빠지는 일

심리학, 선과 장자 사상, 수행 등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룬 사람 중에는 남의 스승 노릇을 하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응용하고 쓸모 있어지기”를 갈망하고, “숭배와 인정”을 갈망하는 것은 새로운 단계에서 마에 빠지는 일이다. 특히 본래 세상에 뛰어들었다가 좌절하여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벗어나는 법”을 배우던 사람이 조금 성취를 이루자 다시 “세상에 들어가 제왕의 스승이 되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그렇다. 레닌이 되는 꿈, 지도자가 되는 꿈, 난화이진이 되는 꿈을 꾸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앞선 글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참조.

또 자신을 향해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앞선 글 「경지 집착 증후군」, 「수행자의 작은 자아」 참조.

이런 마성과 들뜸으로는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없다. 작은 자아끼리 서로 맞서게 할 뿐이다.

三、의사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도는 가벼이 전하지 않는다

『논어』: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고,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말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역경』: 내가 어린 몽매한 이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장자: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왕안석: 나는 만 권의 책을 읽어 천하의 이치를 모두 알았네. 지혜로운 이는 스스로 알겠지만, 어리석은 이 누가 그대를 믿겠는가. 기이하구나, 한가로운 도인은 세 구절 밖으로 뛰어나왔네. 홀로 자신의 근본에서 깨달으니, 다른 곳에서 비롯되지 않네.

『관자』: 안 될 사람과 사귀지 말고,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며,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러 주지 말라. 안 될 사람과 사귀고, 할 수 없는 사람에게 강요하며,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러 주는 것을 수고만 하고 공은 없다고 한다. — 믿을 수 없는 사람과 가까이하지 말고, 한결같은 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요구하지 말며, 미혹되어 무지한 사람에게 도를 전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수고만 하고 성과는 없을 것이다.

四、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다

수행은 오직 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시대가 요동칠 때 고요한 사람 한 명은 성난 바다의 등대이자 고비사막의 호수다. 그 고요함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기르고, 지탱할 수 있다.

병법에서는 산처럼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장수의 의미 가운데 큰 부분은 바로 고요함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다. 소철이 말했듯 “장수가 되는 도리는 먼저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다.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도 낯빛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 해방전쟁 시기에는 “포탄이 빗발쳐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제10종대다”라는 말이 있었다.

장구이메이 선생처럼 산골에 깊이 뿌리내려 명예와 이익을 따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왜 감동하는가. 사람들은 왜 늘 고승과 도사와 은자를 우러러보는가. 속물적인 경쟁의 장이 소시민과 영세 자산가를 집어삼키는 세상에서, 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이를 보기 때문이다. 에고가 강하고 자신의 권세, 부, 지식에 의기양양해하거나 끝없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장구이메이 선생을 직접 마주하면, 갑자기 자신의 모든 작은 자아와 집착이 공허해진다. 이것이 바로 고요한 물에 자신을 비추는 일이다. 높은 산을 우러르듯, 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

공허한 말은 쓸모없다. 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라. 가족과 친구에게는 그저 사랑으로 이로움을 주면 된다.

매력의 단계: 얕은 단계는 외적 매력이다(권력, 돈, 지식, 지위, 외모, 유행, 성적 매력 등). 그다음 단계는 인격의 매력이다(내면의 중심이 튼튼해진 뒤). 깨달은 이의 단계는 영혼의 매력이다(본래의 온전함).

五、고요함으로 자신을 닦다

담박함으로 뜻을 밝히고, 고요함으로 먼 곳에 이른다.

『장자·경상초』: “바르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밝아지며, 밝아지면 비워지고, 비워지면 무위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진다.”

좌망, 심재, 비어 있는 방에 밝음이 생겨남. 마음을 재계하여 비워야 담을 수 있다.

『관자』의 마음으로 도를 행하기:

“겉으로 드러나는 사귐은 친밀함에 이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애정의 수고는 결속에 이르지 못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베풂의 덕은 보답에 이르지 못한다. 사방의 사람들이 귀의하는 것은 마음으로 도를 행하는 이다.” — 겉으로 친밀함을 드러내는 우정은 실제로는 가깝다고 하기 어렵고, 겉으로 애정을 드러내는 사귐은 실제로는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하기 어려우며, 겉으로 드러내는 베풂의 은혜는 실제로는 보답을 말하기 어렵다. 천하의 마음이 돌아오게 하려면, 핵심은 여전히 묵묵히 도를 행하는 데 있다.

고요함으로 사람을 가려내고, 고요함으로 사람을 얻으며, 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라.

六、시끄러운 세상에서는 고요함이 가장 크게 울린다. 고요한 울림으로 이루다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사람의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여 소리가 멀리 퍼지지 못한다. 고요함이야말로 멀리 퍼져 마음의 현을 울린다. 하늘의 소리는 적막하다.

어디나 꿈과 환상, 물거품과 그림자뿐이니, 거품이 없는 곳이야말로 공간이다.

어디나 불타는 집처럼 뜨겁게 타오르니, 서늘함이 곧 천국이다.

어디나 성난 바다가 포효하니, 고요한 등대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七、마르크스주의의 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기

많은 사람이 이해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기세가 드높고, 청년의 피가 끓으며, 싸우고 비판하는 것이다. 지극히 적극적으로 분투하고 전진하며, 불처럼 세상에 뛰어드는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주의는 고요하고 침착하며, 흐름을 따라 무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일이 아니라, 가장 고되고 가장 길며 가장 깊은 혁명이다.

눈부신 마오쩌둥을 사례로 보더라도, 많은 사람은 그가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사나운 호랑이처럼 움직이는 면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흐름을 따라 무위하며 고요히 지키는 면은 간과한다. 농민운동에 녹아들고 산으로 들어간 것은 흐름을 따른 것이었다. 침체기에 다수가 동요하며 “붉은 깃발을 얼마나 오래 들 수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품을 때, 그는 “작은 불씨”를 고요히 지켜 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은 절정기의 “들판을 태울 수 있다”는 말만 보고, 가장 귀한 것은 침체기에 굳게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레닌을 사례로 보면, 초기와 중기의 침체와 망명 속에서도 그저 고요히 도를 지켰을 뿐이다. 쑨원 선생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사례로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평생 진정한 혁명의 절정기를 보지 못했고 세계대전도 보지 못했다(제1차 세계대전은 엥겔스가 세상을 떠난 뒤 십수 년 후에 일어났다). 그저 고요히 도를 지켰을 뿐이다.

만델을 사례로 보면, 전후 제4차·제5차 콘드라티예프 파동과 베이비붐으로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를 굳게 지켰다. 그저 고요히 도를 지켰을 뿐이다.

추신.

A. 말 없음

천구잉의 『노장 신론: 장자 인식 체계의 특색』에서 인용

언어와 문자에는 흔히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계산적인 마음이 숨어 있다. 그래서 장자는 사람들에게 “말 없음의 말을 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주관적 편견이 없는 말을 하라는 뜻이다. “치언은 날마다 솟아나고, 자연의 분수에 따라 조화를 이룬다”(「우언」)는 것이 바로 “말 없음의 말을 하기”의 표현이다. 장자는 천지만물이 묵묵히 운행하는 모습을 깊이 살폈다. “천지에는 큰 아름다움이 있으나 말하지 않고, 사계절에는 분명한 법칙이 있으나 논하지 않으며, 만물에는 이루어지는 이치가 있으나 설명하지 않는다.”(「지북유」) 천지의 아름다움은 말 없음으로 드러난다. 장자는 이처럼 대자연을 말없이 살피는 데서 말 없음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였다. 장자가 “말 없음의 말을 하기”를 주장한 것은 주로 계산적인 마음에서 나온 말을 겨냥한 것이다. 한편 그가 말한 “말을 잊기”는 직관적으로 깨닫고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 점에서 선종의 불립문자는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장자의 앎은 사물의 이치와 명칭을 구별하는 일을 중시하지 않는다. 곧 외부의 객관적인 앎을 중시하지 않고, 주체 내면의 느낌을 중시한다. 그는 앎이 인생의 차원에 뿌리내려 내면의 생명을 안정시키는 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앎은 주체적인 앎에 속한다. 어떤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중 단 한 권도 자신의 생명 속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책꽂이 하나일 뿐이며, 풍부한 지식도 인생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장자가 보기에 지식은 반드시 주체의 생명이라는 차원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는 말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이는 지극하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안다는 것은 하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앎이 아는 것으로 자신의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길러, 타고난 수명을 다하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앎의 지극함이다.”(「대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