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불안과 설 명절 불안을 해결하는 법
연말 불안/설 불안을 어떻게 해결할까
연말 불안증을 어떻게 해결할까
29~33세에는 연말 불안증이 아주 심했다. 최근 2년 사이에는 확실히 치유되었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젊고 활력이 넘치고 기운도 충분하고 희망도 컸기에, 비록 형편이 좋지는 않았어도 연말 불안증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시간에 대한 불안은 시간이라는 과제뿐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도 관련되어 있어 매우 복잡하다.
- 진로 계획에 대한 불안
한편으로는 직업과 업계 자체의 문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균형이 무너지고 막막해지는 문제다.
많은 프리랜서에게서 이것이 더 두드러진다.
또한 가혹한 초자아, 가혹한 작업 감독과도 관련된다. 프리랜서로 일하던 첫 몇 년 동안 나는 해마다, 달마다 나 자신에게 KPI와 OKR을 정해 주고, 매달 또 매년 결산을 썼다. 스스로를 착취하는 악덕 지주 황스런 노릇을 하다가, 결국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자 오히려 더 많은, 더 질 높은 결과물이 나왔다. 이제는 연말 결산도 쓰지 않고 대신 ‘연말 스케치’를 쓴다. 한 해 동안 얻은 것과 겪은 일은 사실 글로도, 심지어 머릿속으로도 좀처럼 총정리할 수 없고, 그저 어렴풋이 스케치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 사회적 시계의 과제, 또래 경쟁의 과제
고전적인 과제이며, 특히 동아시아 청년들에게서 두드러진다. 한편으로는 진로 계획의 문제이면서 또래와의 비교, 엘리트주의, 실존주의, 맞선과 출산의 과제와도 관련된다.
이 모두 복잡한 과제다. 마르크스+장자+심리학 체계 전체를 활용해 세계관·인생관·가치관을 다시 세우고 내면의 핵심을 치유해야 한다. 앞선 글 「학력 열등감을 어떻게 해결할까」. - 원가족의 과제, 성장 환경의 과제
연말, 특히 음력 연말에는 원가족과 성장 환경의 과제가 얽힌다. 이런 과제들은 앞서 말한 진로 계획, 사회적 시계, 또래 경쟁의 과제와도 관련된다. 과제에 과제가 얽히고 과제가 이토록 많으니, 끊어 내고 비우고 놓아주어야 한다. - 중년 위기의 과제, 실존적 위기의 과제
어빈 얄롬이 말한 실존적 도전, 즉 고독, 무의미, 자유와 책임, 죽음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과제다. 연말이나 중년에는 여기에 더욱 휘말리게 된다. 죽음 불안의 과제는 「가혹한 초자아와 자기 공격의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학력 불안을 어떻게 해결할까」에서 다룬 것처럼 후기의 과제이므로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죽음 불안의 과제는 부모의 나이라는 과제와도 관련되어 부모의 죽음 불안과 얽히게 된다. 여전히 과제에 과제가 얽히므로 과제의 분리가 중요하다.
앞선 글 「대학생의 기본 모순」, 「평범한 사람의 심리적 성장」, 「장자와 대자연은 실존적 위기를 치유한다」, 「대학생이 막막함을 느끼는 흔한 경우 중 하나: 실존적 위기」
돈과 능력의 과제
돈과 능력의 과제는 생존의 과제다. 결국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 장자의 무용지용, 마르크스의 소외. - 평범함을 받아들이는 과제
「평범함을 받아들이기」는 높은 수준의 과제다. 평범함, 무능, 무위를 받아들이고, 욕심내거나 구하는 것 없이, 근심 걱정 없이 자연의 흐름을 따르며, 주어진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형편에 순응하는 것이다. - 현재를 살아가기
이 역시 학력 열등감과 마찬가지로 과거·미래와의 화해와 관련된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현재를 살아가기, 지금에 감사하기, 자신에게 감사하기다.
연말 불안증은 인생, 운명, 과거, 시간과 화해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감사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어 단순하지 않다.
이를 통해서도 많은 과제의 이면에는 세계관·인생관·가치관 체계 전체를 다시 세우는 일이 얽혀 있으며, 마르크스+장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마르크스+장자+심리학 체계 개요」
12.28 어두운 면을 어떻게 끌어안을까
어두운 면을 끌어안는 것은 심리와 마음의 영역에서 중요한 과제다.
어두운 면이란 우리가 두려워하고, 밀어내고, 맞서고, 피하고, 미루는 면이다. 내면의 작은 자아, 감정, 트라우마, 방어, 집착, 업장이다. (앞선 글 「업장 특집」) - 두 사람
- 융은 이것으로 유명하다.
앞선 글 「‘나’의 구조: ‘실제의 나’가 리비도와 함께하기」에서 융의 체계와 비교했다. 융의 치유와 성장 경로는 자아(ego)가 콤플렉스, 그림자, 하위 인격, 인격의 파편 등(업장)을 통합하려고 ‘노력’하면서 점차 자기(self, 원만함)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융이 스피노자(융 자신이 언급했다) 등 독일 객관적 관념론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자기’ 개념은 스피노자의 자연의 동일성, 셸링의 절대적 동일성, 도가의 ‘도’와 비슷하며,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융이 도가 철학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괜찮은 심리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도 어두운 면을 끌어안는 이야기를 한다. 열등감, 난처함, 거절당한 느낌, 낙담, 수치심을 느끼며 자신에게 그런 면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드름이 난 열네 살 소년 같은 모습이다.
이 체계는 실천하기 쉽고 구체적이지만, 분명 ‘누구나 본래의 온전함을 지니고 있어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다’는 인본주의, 장자와 선종의 체계와는 다르다. ‘노력’, ‘내면아이 치유’ 같은 흔한 심리학 개념은 내가 동의하는 관점이 아니다. 앞선 글: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자연의 흐름을 따르되, 애써 힘을 쓰면 어긋난다」, 「새로운 작은 자아의 탄생, 수행자의 작은 자아」, 「‘내면아이’가 나를 치유한다」 - 길리건
앞선 글 「길리건 심리학: 도가 계열의 심리학」
스티븐 길리건은 스탠퍼드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에릭슨의 제자다. 길리건의 심리학 유파는 현재 나와 가장 가까운 유파다. 그 자신도 도가 철학을 무척 좋아하며, 나 역시 그의 유파가 장자의 심리학이 어떤 모습일지를 가장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주로 다음과 같은 체계가 있다.
a. 본래의 온전함;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온전함을 느낄 수 있을까」,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 개념 발전 약사」, 「인본주의 VS 마르크스주의」
b. 자기-타인-세계의 깊은 연결, 일종의 깊은 실존적 체험; 「평범한 사람의 심리적 성장: 심리적 경계와 자기대상관계 이론, 대상관계 이론」
c. 표층의 언어적 사고 VS 심층의 마음; 앞선 글 「장자의 제물론과 마르크스: 표층의 언어적 사고에서 심층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d. 자연의 흐름을 따르기(본래의 온전함+깊은 연결+심층의 마음->자연의 흐름을 따르기). 긴장을 풀고 본래의 내가 자연스럽게 치유하도록 두기: 본래의 나는 스스로 실제의 나를 치유한다. 실제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항하지 않고, 이리저리 들쑤시지 않는 것이다.
e. 어두운 면 끌어안기: 일본의 모리타 요법에서 말하는, 고통은 자연의 흐름에 맡기고 일상에서는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 역시 도가에 가깝고 실천적인 표현이다.
f. 수용: 받아들이고,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며, 무능과 무위를 받아들이고, 자연과 운명에 맞서기보다 순응한다. 받아들이고 긴장을 풀어 본래의 나와 마음의 힘/리비도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한다.
종합하면, 이 체계는 분명 본래의 온전함, 내면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치유한다는 데 기반한,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는 체계다. 장자, 선종, 인본주의에 더 가깝다. 실제의 나의 의식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긴장을 풀고 맞서지 않는 것이다. 융식의 ‘노력’, ‘내면아이 치유’ 체계와는 다르다. - 무엇을 끌어안을까
(1) 회피
어두운 면은 회피에서 비롯된다. 한편으로는 도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을 돌보며 살아 본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자기 마음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 반대편에서는 사회가 우리에게 ‘순수하고 티 없이’ 살라고 훈육한다. 사람을 발끈하게 만드는 흔한 말이 있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사회화, 대상화, 도구화, 물화, 소외는 다채로운 내면의 과제와 감정, 상태의 기복을 깎아내리고 ‘감정의 안정’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앞서 「감정은 허구의 개념이다. 인격은 안정적으로, 감정은 자연스럽게」, 「정신분석은 평범한 삶 속의 시적 정취, 신성함, 크툴루를 보게 한다」를 썼다.
회피하던 것을 끌어안는 과제란 감정을 끌어안고, 잡념을 끌어안고, 업장을 끌어안는 것이다(「수행자의 작은 자아」). 내가 ‘리비도’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것은 내면의 감정, 기복, 업장, 동력에 이름을 붙이기에 아주 좋고, 복잡한 내면과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우게 해 주기 때문이다.
교양 교육과 심리학 교육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감정을 끌어안아야 하며 감정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분노에는 흔히 낙인이 찍히지만, 분노는 아주 건강하고 정상적이며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감정이다. 분노를 억누르면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다루는 많은 접근에서는 수용, 허용, 끌어안기를 강조한다. 헬링거의 「나는 허용한다」처럼.
잡념과 업장을 끌어안는 것은 ‘수행’의 중요한 개념이다. 많은 수행자가 자신에게 잡념이나 업장이 생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이것 자체가 업장이다. 깨달음이란 본래 마음이 고요하여, 업장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져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장자: “지극한 사람은 마음을 거울처럼 쓴다. 떠나는 것을 붙잡지 않고 오는 것을 미리 맞으려 하지 않으며, 사물에 응하되 담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을 감당하면서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깨달음을 신비화하여, 깨달은 뒤에는 늙은 승려가 선정에 든 것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다거나, 전지전능해져 돌을 금으로 바꾸고 하늘을 날고 땅속을 드나들게 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깨달음이란 만 리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구름이 많아도 햇살은 여전히 밝게 빛난다.
사실 루쉰, 쑤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떠올려 보면 된다. 그들에게는 번뇌와 혼란, 궁핍, 생계를 꾸려야만 하는 때가 없었겠는가. 그들이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겠는가. 루쉰의 글은 분노에 차 있고 비장하지만, 그의 내면은 고요하다.
(2) 불안 끌어안기
불안은 나쁜 것이 아니고, 도피는 좋은 것이며, 미루는 습관은 문제가 아니다.
PC방, 게임, 이차원 문화, 숏폼 영상은 늘 중국의 한 세대 청년들을 망칠 것이라는 말을 듣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도피’는 위니컷이 말한 ‘중간 공간’, 나아가 안아 주는 환경의 역할을 했다. 서른다섯 살에 돌아보면, PC방에서 보내던 날들은 압박이 심했던 청소년기에 좀처럼 얻기 어려웠던 숨 돌릴 틈이자 정신적 공간이었다. 십수억 명이 삶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도 여전히 소박한 진선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본래의 온전함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온전함을 느낄 수 있을까」
불안은 왜 좋은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불안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신호다. 「인간관계에서의 선별」, 「그 시절, 듣기 싫어도 옳은 말이라며 내게 문제가 있다고 하던 사람들이 내게 문제를 만들었다」
미루는 것은 마음의 힘이 없기 때문이며, 자기 공격은 마음의 힘을 더욱 손상시킨다. 그래서 「미루는 습관은 허구의 개념이다」를 썼다. 많은 경우 미루는 것은 사실 리비도가 이미 판단과 결정을 내렸지만, 의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