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업장은 우리의 업장을 통해 작용한다—또래이자 같은 직무를 맡은 동료와의 업장 얽힘을 예로
다른 사람의 업장은 우리의 업장을 통해 작용한다: 동년배이자 같은 직무를 맡은 동료 사이의 업장 얽힘을 예로 들어
일、동년배이자 같은 직무를 맡은 동료 사이의 업장 얽힘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적으로 삼는다. 동년배 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소모적인 경쟁이 아니게 되려면 공산주의가 실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전까지 이는 시험 풀이에 익숙한 사람들, 대학생, 소시민의 실존적 위기를 낳는 근원 중 하나다.
앞선 글 《연결 VS 얽힘: 세계와 맺는 관계》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다른 사람의 업장은 우리의 업장을 통해 작용한다
자연스럽게 이런 반응이 나온다. 동년배이자 같은 직무를 맡은 동료가 업력을 투사해 올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먼저 내 안의 ‘고수라는 에고’가 고개를 든다. 나는 내 ‘고수’로서의 소양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내 경지로 상대를 ‘승복’시킬 수 있을지 생각한다. 물론 ‘고수’라는 마음가짐과 고수라는 에고가 위험하며, 상대의 업장을 더욱 자극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고수라는 에고 자체가 애초에 자극받아 드러난 업장이다.
동년배이자 같은 직무를 맡은 동료의 업력 투사가 일어날 수 있고, 그로 인해 내 안의 어떤 업장이 자극받아 드러날 가능성도 크다. 물론 허용한다. 업장을 허용하는 것 역시 내게는 진전이다.
게다가 내가 풀어야 할 과제도 많이 줄었고, 업장도 많이 줄었으며, 알아차림의 정도와 빈도도 훨씬 높아졌다. 베이징에서 타향살이하는 사무직 노동자로서 실존적 방황을 겪던 정체기도 넘어섰다. 나는 줄곧 동년배와의 관계에서 그리 심각한 과제를 겪지 않았고, 비교적 나만의 특수성과 주체성을 따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다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업장은 우리의 업장을 통해 작용한다. 결국 괴로움의 원인은 우리 자신의 업장이다. 고집멸도다.
우리의 업장은 상대의 투사를 끌어들이기도 하고(그 투사가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나아가 상대의 투사와 얽힘을 자극하기도 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업력을 투사하는 것은 자신의 울음과 떼쓰기를 받아줄 구세주, 금강과 같은 그릇, 강한 엄마를 찾는 것이다. 병적인 이상화다. 그런데 많은 ‘고수라는 에고’는 구원과 자기 증명에 집착하니, 이런 시련을 겪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원가족의 업력 얽힘에서 매우 중요한 고리 중 하나는 부모의 역할 역전이다. 부모가 감정적으로 무너져 아이의 돌봄을 기다리고, 아이는 부모를 구하려는 마음과 자책감에 사로잡힌다.
삼、자성의 빛,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기
자신이 밝게 빛나면 상대의 업장 투사는 돌이 물에 던져지고 눈부신 빛이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다. 가는 것을 붙잡지도, 오는 것을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자신이 밝게 빛나면 더 많은 밝음, 더 많은 안정과 연결된다.
업장과 알아차리지 못함에 맞서 싸울 힘은 우리에게도 없다. 맞서 싸우는 것 자체가 업장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긴다.
우리 역시 관계 하나하나 속에서 자신의 업장과 자성의 빛을 본다. 자기 안의 용암을 본다.
《경덕전등록》에서 사조는 우두종 법융 대사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자성은 본래의 온전함을 지니고 있다. 모든 번뇌와 업장은 본래 공적하고 실체가 없다. 모든 인과는 꿈이나 환상과 같다. 벗어날 삼계도 없고, 구할 보리도 없다. 그저 마음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맡기면 된다. 관상하며 수행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마음을 청정하고 맑게 만들 필요도 없다. 거리낌 없이 탁 트여 아무런 막힘도 없이 자유롭게 오가며,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이에 눈에 닿고 마주치는 모든 것이 인연의 계기이며 언제나 부처의 오묘한 작용이다. 그저 마음을 따라 자유로우면 된다. 애써 대하거나 처리할 필요가 없으니, 이를 상주법신이라 하며, 이 밖에 다른 변화는 없다.
사、‘청정함, 높은 에너지, 성장과 깨달음’을 향한 선망과 질투
마음의 성장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에게는 예전 인연이나 옛 동료, 나아가 일부 개인 미디어 구독자나 상담 고객이 그가 경험한 청정함, 높은 에너지, 성장과 깨달음, 세상에 나아가 기세를 얻는 일을 선망하고 질투하며 부정하는 일이 생긴다.
그들은 ‘고수라는 에고’를 인정하고 추켜세우며, 그것이 드러나도록 유도하고 자극한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내가 더욱 애쓰고 더욱 자신을 증명하면서 그들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 ‘고수라는 에고’와 힘을 쏟는 행위로 업장이 쌓이고, 여기에 그들의 다른 업장 얽힘까지 더해져 내 상태가 더 낮아진다. 그러면 그들이 나를 얕보고 깎아내리려는 욕구가 충족된다. 다행이네, 너도 그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아마 많은 수행자와 청정한 사람이 모두 거쳐야 하는 관문일 것이다. 융이 말했듯이, 당신의 자성이 내는 빛은 어떤 사람들에게 눈부시고 거슬리게 느껴질 수 있다. 여덟 가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더니, 방귀 한 방에 강을 건너온다.
사람 마음속 업장은 복잡하고 어둡다. 많은 사람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나를 ‘아주 진정성 있고 수준 높게’ 인정하고 내게 ‘도움을 청한다’고 여기며,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관계를 가려 맺고, 청정함을 지키고, 에너지를 거두어 모아야 한다.
오、아이는 왜 아름다운가
아이는 업장이 적고 빛이 많으며, 본래의 온전함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업장이 자극받는 일은 적고, 아름다운 연결은 많다. 아이에게도 역할 역전이 일어난다. 본래 어른의 돌봄을 받아야 하지만, 흔히 그릇이 되어 어른의 무너짐과 업력 투사를 담아낸다.
내가 조카에게 고마운 것은 그 아이가 아름답고 순수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빛을 받으며 나 자신의 아름다움도 느낀다. 하지만 그 아이가 집안의 업력에 삼켜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일은, 남을 구하려는 내 성향을 더욱 강하게 하고 내 업력을 더 무겁게 했다. 이것이 운명의 복잡한 또 다른 면이다.
말썽꾸러기 아이가 밉게 느껴지는 것도 그들의 업장(대부분 부모에게서 온다)이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딸기 케이크 속에 든 진흙처럼.
덧붙임: 《직장살이 동무는 자구의 동반자인가, 감정 쓰레기통인가》
《열자》:
백혼무인이 말했다. “그만두게. 내가 본래 사람들이 자네에게 귀의하러 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과연 귀의하러 왔군. 자네가 사람들을 귀의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귀의하지 않게 할 수 없는 것이네. 자네는 어찌하여 남다른 기색을 드러내 사람들을 그토록 기뻐하게 하는가?
자네가 비범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면, 그들 역시 반드시 그 기쁨으로 자네의 본성을 뒤흔들 것이니, 이 또한 아무런 이로움이 없네. 자네와 사귀는 사람들은 자네에게 이 이치를 알려주지 못하네. 그들의 교묘한 말은 모두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독일 뿐이네. 그 누구도 그 속에서 깨닫지 못하는데, 어찌 서로 가르침과 도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