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업장 시리즈

업장·특집

알아차림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업장이라고 한다. 사람이 선정에 들어 있거나 에너지가 높은 상태가 아니라면, 업장 속에 있는 것이다. 업장은 본연의 나라는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으로, 온 하늘을 뒤덮고 해를 가린다.

업장은 알아차림과 본연의 고요함에서 사람을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다. 사람이 이미 본래의 온전함 그 자체이면서도 본래의 온전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이 바로 업장이다.

외적인 업장이란 마르크스주의에서 논하는 사유제, 역사 유물론, 세 개의 큰 산 등 사람을 부자유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을 가리킨다. 흔히 볼 수 있으며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내적인 업장, 곧 정신적인 짐이다.

일、업장의 기원: 부정적인 경험, 감정, 상태, 작은 자아

이、업장의 뿌리: 감정, 고통; 작은 자아, 집착, 동일시; 심리적 방어, 트라우마, 질병.

삼、업장의 형성: 갈등, 마음의 응어리, 정체; 습기, 성격, 심리적 패턴, 인격 패턴; 맺힌 덩어리, 가시; 높은 벽, 심연, 수렁. 마음속 마귀. 작은 자아와의 동일시.

사、업장은 흐름을 가로막는다

  1. 얼음 조각: 어떤 경험들은 본래 흘러가야 하지만 얼어붙어 버려, 얼음 조각처럼 생명의 강을 가로막는다. 얼어붙은 조각들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되풀이하며 강 전체의 온도를 떨어뜨린다.

얼음 만들기: 이런 얼음 조각들을 깨뜨려 녹이기는커녕, 오히려 거부하고 저항하고 대항하고 부인하거나 동일시하면, 이 응어리들을 의식하고 풀어내는 과정이 막히고 얼음 조각들은 더욱 단단히 얼어붙으며(얼음핵과 제빙기), 많은 에너지와 의식도 함께 얼어붙는다.

  1. 가시 피하기: 외부의 그 무엇도 가시를 건드려 아프게 하지 못하도록, 더욱 뒤틀리고 복잡한 회피와 방어를 한다. 삶은 이 가시를 중심으로 짜이게 된다.
  1. 걸림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데, 사방에 널린 업장은 마치 바닥 가득한 걸림돌 같아서, 아무렇게나 한 발만 내디뎌도 걸려 넘어져 일어나지 못한다.
  1. 마음에 높은 벽을 쌓아 자신을 가두고, 생명의 흐름과 에너지, 빛을 가로막는다.

오、업장의 해소

가시를 뽑고 나면, 본래 아무것도 없었음을 발견한다.

얼음이 녹으면, 얼음에 갇혔던 에너지와 가로막혔던 생명이 회복된다.

벽을 허물고 나면, 사방이 밝다는 것을 발견한다.

육、업장을 알아차리고 해소하기 어려운 이유

업장은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고, 깨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업장은 성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성미가 급하다거나, 성질이 나쁘다거나, 곧은 성격이라거나, 잘 웃는 것 등이다.

업장은 일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생각에 잠겨 산책하는 일 등이다.

업장은 노력과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열심히 분투하고, 인간의 의지로 하늘도 이길 수 있다고 여기며, ‘노력하는 사람의 작은 자아’로 나타난다.

업장은 수행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행자의 작은 자아’다.

업장은 ‘작은 자아’, 곧 ‘나’의 얼굴로 나타난다. ‘익숙한 고통의 느낌’, ‘익숙하고 늘 그래 왔던 느낌’으로 나타난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담배 냄새와 입 냄새에 익숙해져, 오히려 담배가 자신의 ‘상태를 더 좋게 해 준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흡연자’라는 정체성과 동일시하면, 담배가 본체가 되고 다른 것들은 담배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

업장은 꿈속의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한 꿈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다른 꿈속에 있는 것이다.

아들러의 ‘현재의 이득’이라는 말로 설명하자면, 업장은 그저 과거에 남은 나쁜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이득’도 지닌다. 업장이 작은 자아를 만들어 내고, 작은 자아는 끊임없이 업장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업장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재의 작은 자아에 있다. 작은 자아는 업장이 좋다고 여긴다. 업장은 작은 자아에게 익숙한 배양 접시이기 때문이다.

칠、업력의 대물림

아이가 꽃 한 송이를 들고 엄마의 코앞으로 내밀며 말한다. “엄마, 이 꽃 좀 봐. 정말 예쁘고 향기롭지?” 한 엄마는 웃으며 아이를 안아 올려 그 꽃의 향기를 맡고 말한다. “그러네, 정말 향기롭다. 참 행복하네.” 다른 엄마는 손으로 아이의 손을 쳐내며 말한다. “귀찮게 하지 마.” — 이것이 업장이 드러나는 가장 전형적인 장면이다. 업장은 우리 곁에,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보고도 보지 못하게 한다. 앞의 아이는 훗날 꽃을 보면 이 행복한 장면을 떠올리지만, 뒤의 아이는 꽃을 보면 코끝이 찡해진다. 이것이 새로운 업장이자, 집안의 업력이 대물림되는 모습이다.

팔、업장의 유물론적 측면

최근에 이르러서야 업장의 유물론적 측면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외적인 업장에는 마르크스주의가 다루는 차원의 부자유가 있다. 내적인 업장은 빙산과 같아서, 그저 조용히 소화해 나갈 수 있을 뿐이다. 수행자의 작은 자아가 상상하듯 하룻밤 사이에 얼음과 눈이 모두 녹아 없어질 수는 없다.

〈수행은 사이비 개념이다〉라는 글에서 논했듯이, 업장이 소화되는 속도를 내가 통제할 수 있을까? 그 대가들은 수행법을 지니고 있어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업장을 없앴을까? 그저 업장과 공존하며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