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온전함, 어떤 독이 우리를 밖에서 ‘구하게’ 하는가
선종의 요체: 밖에서 구하지 말라. 본래의 온전함.
장자의 요체: 본래의 온전함. 욕망도 추구도 없음.
선종은 분명 지식인과 ‘수행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에게 내린 처방이다. 반면 장자는 본래의 온전함에 대해 훨씬 더 담담하고 확신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온 세상을 거슬러 짚어 본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생명을 해치고, 우리의 천성을 해치며, 우리가 구차하게 이익을 좇고 분주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가.
어린아이였던 우리가 나무 아래에서 돌멩이와 나뭇잎을 가지고 놀고 개미와 나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본래 충분히 괜찮고 원만하고 고요했다. 무엇이 우리에게 자신이 ‘충분히 괜찮지 않다’고, 불완전하고 초조하다고 느끼게 했을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는 고작 3년,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는 고작 6년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활력 넘치던 초등학생들이 의기소침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대학생이 되었을까.
첫째는 분명 사유제, 굶어 죽을 수 있다는 위협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설명하는 문제다.
둘째는 노동의 소외, 곧 노동 생산물, 노동 과정, 타인, 인간 본질로부터의 소외다. 이는 사유제 문제에서 파생된 문제다.
셋째는 트라우마의 업장이다.
- 유해하고 상처를 주는 대상관계 환경은 우리의 자기가 건강하게 발달하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해리와 붕괴, 유독성 수치심, CPTSD로 이어지게 한다.
- 열등감-자만-자기 공격은 우리와 우리 자신의 관계를 단절시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공감하지 못하게 하며, ‘전지전능’을 구하고 자신에게 ‘더 노력하라’고 강요하게 한다.
- ‘조건부’ ‘사랑’은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고, ‘조건’과 ‘우수한 성과’, ‘전지전능’을 구하게 한다.
- 부모를 ‘바꾸고’ ‘구원하겠다’는 집념은 우리가 ‘전지전능’을 구하게 한다.
- 불안은 우리가 ‘통제’를 구하고, 방어를 겹겹이 쌓고, 회피하며, ‘전지전능’을 구하게 한다.
- 지식에 대한 의존과 숭배, 불안은 우리가 전지전능을 구하게 한다.
- ‘능력’, ‘노력’, 자기 공격은 우리가 ‘더 노력하기’를 추구하게 한다.
- 실존주의적 업장, 고독, 무의미, 자유와 책임, 죽음. 이것들은 사람들이 우수한 성과와 엘리트 지위, 전지전능을 추구하게 하고,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신’의 힘에 의존하고 거대 서사에 의존하게 한다.
그래서 장자는 우리에게 평범함과 유한함, 무능함과 무위를 받아들이고,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며, 지혜와 성스러움을 버리라고 한다. 대자연으로 돌아가 식물과 친구가 되고, 우리가 본래 우주의 조화로운 일부이며 만물이 모두 우주의 자녀임을 보라고 한다.
재주 있는 자는 수고롭고, 지혜로운 자는 근심하지만, 무능한 자는 배불리 먹고 유유히 노닌다.
〈일하기는 싫고-능력은 한정되어 있고-자본은 없고-굶어 죽을 수 있다. 이것은 인류의 곤경이자 마르크스와 장자의 주제다〉:
능력과 자본을 추구하는 과정은 우리의 불안과 초조를 더 심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애초에 능력과 자본을 추구했던 이유가 불안과 초조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인간은 노동 과정(테일러 시스템 등)과 노동 성과(자본)에 종속된 노예가 된다.
노동은 인류의 실천에서 개인의 감옥으로 변했다. 능력은 인류의 철학적 능동성에서 개인에게 씌워진 고삐와 안장으로 변했다(『장자』 「마제」).
일하기는 싫고-능력은 한정되어 있고-자본은 없고-굶어 죽을 수 있다. 마르크스와 장자는 인류의 이런 비참한 운명을 깊이 이해했다. 이것은 개인의 곤경이 아니라 인류의 곤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