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 마르크스주의의 유사성과 상통하는 지점
장자와 마르크스주의의 유사성과 상통하는 점
앞선 글: 《마르크스와 장자는 보통 사람과 탕핑하는 사람의 철학이다》
(一)만인의 평등, 무조건적인 존재, 인본주의
객관적 관념론의 세계관은 도가의 ‘천인합일’, 장자의 ‘제물론’, 곧 “천지는 나와 함께 생겨나고, 만물은 나와 하나다”라는 사상의 뿌리다. 개인은 세계의 대도를 이루는 한 고리이자 한 구성원이다. 이는 궁극적인 설명이자 궁극적인 실존적 자기 확인이다. 정신역동학이 중시하는 ‘자기-타인-세계’의 조화로운 연결과도 같은 것이다.
- 개인이 존재하는 의미에 대한 답이다.
개인의 존재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퀴벌레는 수억 년 동안 존재해 왔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사람들이 삶의 소외와 무의미함을 느끼기에 비로소 ‘의미’를 묻는다.
《사람은 어떻게 더 나아지고 자신감을 얻는가? 외부에 기대지 않고, 병을 다스리고 업장을 없애 본연의 나로 돌아가기》
- 무조건적인 존재
바퀴벌레가 존재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해야 하는가? 즐거우려면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가? 그 어느 것도 필요 없다.
인간은 우주의 자녀이며, 우주에서 비롯된 만물 가운데 하나다. 만물은 모두 형제이며, 모두 무조건적인 존재다.
《장자: 당신은 부모의 자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자녀다, 장자 내편 일곱 편의 개요 첨부》
- 만인의 평등, 사람과 만물의 평등, 아상도 중생상도 없음
자신이 다른 사람, 다른 동물,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낙엽 한 장과 완전히 동등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a. 세계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세계를 배척하거나 세계와 단절되고 낯설게 느끼는 대신에 말이다. 이는 작은 자아가 우월감과 독특함을 병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치유한다.
b. 죽음도 그토록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생겨나는 순간 죽어 가고, 다시 원자로 돌아가는 것은 다음 진화가 시작되는 일이다.
c. 불교처럼 만물과 개인이 실재인지 허상인지를 놓고 고심하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를 어루만지면 서로의 존재를 깊이 느낄 수 있다.
- 만인은 평등하며,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
이는 선종, 장자, 인본주의,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고 원만한 마음과 지성을 지니고 있다. 수행하기보다 내면에서 찾는 것이다. 본연의 나가 지닌 지혜는 언제나 원만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지혜와 독해력, 선진성을 한 번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와 지식인은 철학을 버리고 부자가 되는 일을 추구했으며, 현재 철학은 노동계급 안에서만 생명력을 지닌다. 그들에게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만인은 평등하며, 가장 낮은 사람에게 가장 높은 지혜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선진성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소규모·영세 자산가와 그 밖의 상층계급은 부패하고 소외된 정도가 깊은 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소박한 진선미를 지니고 본연의 평온함을 더 많이 간직하며 노동 속 몰입과 마음챙김을 더 많이 경험한다. 그렇기에 선진성을 지닌다.
인본주의와 장자, 마르크스주의
앞선 글:
《인본주의 VS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와 1844년 초고에 관한 한 가지 핵심》
《여래장,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 개념이 일어나는 데는 수백 년이 걸렸다》
(二)철학적 뿌리가 상통한다
- 객관적 관념론과 도가
많은 사람이 장자와 마르크스주의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고 전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드러누워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과 투쟁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독일 근대철학을 관통하는 한 줄기는 객관적 관념론이다. 스피노자의 ‘자연신’ -> 셸링의 ‘절대적 동일성’ -> 헤겔의 ‘절대정신’은 도가의 도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여기에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적 역사관이 더해지면서 전근대 철학의 정점에 이르렀다.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바로 이 토대를 바탕으로 다시 한 단계 크게 올라선 것이다.
궈모뤄는 자신의 초기 사상 발전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장자를 사랑하고, 네덜란드의 스피노자를 사랑했다. 외국의 범신론 사상과 가까워지자 소년 시절 좋아했던 《장자》를 다시 발견했다. 외국의 사상과 서로 대조하고 비추어 보니, 참으로 ‘어느 날 문득 환히 꿰뚫어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에게 가까이 서는 객관적 관념론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두 사람의 초기 행적을 되짚고 포이어바흐, 헤스와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이 객관적 관념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근원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입장에 서서 소시민적 엘리트주의, 곧 계몽, 시혜, 경멸, 이성 만능, 교육 만능, 사랑 만능을 극복한 데 있다.
장자는 바로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에게 가까이 서는 객관적 관념론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이것이 이미 철학의 정점이었다. 다만 역사적 한계 때문에 헤겔처럼 객관주의적 역사관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장자의 〈거협〉은 전씨가 제나라를 훔친 일을 비판하면서,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되고 사람들이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쌓고 지켜 준다고 말한다. 이 역시 역사가 크게 변화하던 시기, 곧 춘추에서 전국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이루어진 일정한 수준의 객관적 관념론과 계급 분석이었다.
앞선 글:
- 장자 철학과 후기 그리스 철학의 유사성 및 공통점: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 견유주의
- 20분으로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에피쿠로스
(三)예속에 반대한다
장자의 〈마제〉 편은 장자의 유토피아 사상이다. 말을 예로 들어, 인간이 말처럼 지배계급에게 예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일치한다.
“백성에게는 참되고 변함없는 본성이 있다. 베를 짜서 옷을 입고 밭을 갈아 먹는 것은 공통된 본능이다. 하나로 어우러져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을 자연스러운 상태에 맡겨 둔다고 한다. 그러므로 덕이 충만한 시대에는 백성의 행동이 느긋하고 신중하며, 소박하고 꾸밈없는 마음을 지녔다.” — 노동 본능 + “하나로 어우러져 편을 가르지 않음”, 이것이 장자의 사회주의 사상이다.
(四)장자는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에게 가까이 선다
장자는 성스러움을 버리고 지혜를 끊으라고 말하며, 백락이 말을 부리고 해치는 일을 비판한다. 지배계급과 지식인 계급에 대한 조롱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을 만큼 가득하다.
장자는 자주 다양한 장인과 보통 사람을 통해 도를 이야기한다. 소를 해체하는 포정, 목수, 조각공, 매미를 잡는 농부, 장애인 등이 그 예다. 이 역시 인간에게는 본래의 온전함이 있고, 만인은 평등하며, 선진적인 생산력은 노동자의 손에 있다는 이야기다.
(五)장자는 ‘물화’를 비판한다
사물을 부리되 사물에 부림당하지 말라는 말, 평생토록 일에 얽매여 분주하게 산다는 말은 ‘물화’와 ‘대상화’를 얼마나 명확하게 비판하는가. 이는 마르크스가 1844년 초고와 《자본론》을 비롯한 저작 전반에서 말한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생산물인 자본에 지배되고 예속된다”는 사상과 직접 상통한다.
장자가 말하는 천성, 재능은 온전하되 덕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등은 모두 인간의 자연스럽고 온전한 발전을 이야기하며, 인본주의를 제창하고 인간의 소외에 반대하는 것이다.
(六)장자는 “큰 도적을 위해 쌓고, 큰 도적을 위해 지키는” 착취를 비판한다
장자의 〈거협〉은 중국 고대에 지배계급을 비판한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그 때문에 유가로부터 2천 년 동안 미움을 받았다.
장자는 제나라 전씨가 제나라를 훔친 일을 비판했다.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처형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는 유명한 말을 제시했다. 이는 《레 미제라블》, 그리고 엥겔스가 강조한 범죄학의 이치와 상통한다.
게다가 이는 계급적 착취에 관한 하나의 완결된 이론이다.
- “큰 도적을 위해 쌓는다.” 중하층 계급이 힘들게 일하며 노동의 결실을 쌓는 것은 큰 도적을 위해 준비해 주는 일이 아닌가.
- “큰 도적을 위해 지킨다.” 전성자는 군주를 죽이고 제나라 전체를 훔쳐 차지했다. 그가 훔친 것이 어찌 제나라뿐이겠는가? 그곳의 온갖 성스럽고 현명하다는 법규와 제도까지 함께 훔쳐 갔다. 그 성스럽고 현명하다는 법규와 제도는 바로 도적인 그 자신을 지키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닌가. — 눈 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국가관인 “국가는 지배계급과 착취계급의 도구다”에 이미 극히 가까워져 있다.
- “인의를 만들어 바로잡으려 하면, 인의까지 함께 훔쳐 간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인의를 제정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규율했지만, 그 결과 인의까지 통째로 도둑맞았다. — 이는 유가를 비판하는 동시에,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착취계급에 봉사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덧붙임: 물론 《장자》 외편의 많은 내용은 장자 본인이 쓴 것이 아니지만, 그 사상적 맥락은 이어진다. 전씨가 제나라를 차지한 일을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사실 유가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비판의 일부는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황로학’, 곧 도가 수정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이는 제나라 직하학궁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 부분은 국립타이완대학교 철학과 천구잉 교수가 훌륭하게 설명한 바 있다. 앞선 글 《노자 이후 도가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황로는 유위, 장자는 무위》
(七) 실존주의와 장자, 마르크스주의
인간이 심리적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타인-세계가 조화롭게 존재하는 깊고 평온한 실존적 경험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한 철학인 현상학, 상호주관성, 실존주의 등이 집중한 영역이다. 이런 경험의 결핍이 곧 실존적 위기다.
장자 철학의 상당 부분은 실존주의 철학으로 사회문제를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외, 자유와 책임, 죽음, 의미, 윤리, 대상화 등의 문제가 있다.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기, 슬기로우면서도 쓰이지 않기, 지혜로우면서도 기교를 부리지 않기 등이 그 예다. 장자, 실존주의, 에피쿠로스는 모두 죽음의 철학으로 유명하다. 장자 해석의 대가로 유명한 대만의 천구잉 교수 역시 니체와 실존주의 해석으로 출발하여 중후기에 장자 철학으로 들어섰다.
(앞선 글 《대학생이 방황하는 흔한 경우 중 하나: 실존적 위기》: 넷째, 이것이 실존주의가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자 철학의 또 다른 상당 부분은 건강한 자기의 상태를 묘사한다. 재능은 온전하되 덕은 드러나지 않는 것, 좌망, 빈 방에 밝음이 생겨나는 것이 그 예다. 빈 방에 밝음이 생겨난다는 말은 간단하다. 고요하게 마음을 비운 방 안에 따뜻한 빛이 있다는 뜻이다. 그 반대는 빈 방, 곧 자기 자체가 취약한 데다 나쁜 대상, 거짓 자기, 방어기제로 가득 차 있고, 밖으로는 값싸고 악성인 자기대상 경험을 갈망하는 것이다. 자기애에 빠진 거대한 아기, NPD, 흡혈귀가 그 예다.
마르크스주의, 인본주의, 실존주의, 장자, 에피쿠로스 등은 모두 서로 다른 각도에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인간의 마음과 세계의 진실을 향한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를 매우 중시했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와 인본주의를 연구하다 중후기에 마르크스주의로 전환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의 결합을 시도한 것은 올바른 길이었다.
(八)흐름에 따라 행하기, 무능과 무위,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
이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므로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엥겔스: 자유란 자연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과 외부 자연을 다스리는 데 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마오쩌둥의 역사에서 우리는 모두 어찌할 수 없음과 무능, 무위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