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장자 시리즈

가장 근본적인 심리학 모델

가장 근본적인 심리학 모델을 계속 정리하고 탐색하고 있다. 어려운 작업이니, 일단 상황에 따라 거듭 수정해 나가려 한다.

  1. 감각 복합체
    몸과 마음-감각-감정. 대표적인 예로는 불안감/안전감, 무너짐, 통제 상실, 유독한 수치심이 있다.
    인생에는 결국 단 하나의 도전만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괴롭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기”가 가장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과제인 이유다. 별도의 글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
    무명의 업화: 심리학에서는 알아차리면 완화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름 모를 업화’를 느낀다. 괴로운데도 알아차리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익숙한 먹구름, 무너지는 느낌, “또 시작이구나.” 평온에서 고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 담아내기-알아차림 복합체
    (1) 감정 담아내기-알아차림
    i. 자신을 담아내는 능력, 돌보고 달래고 안정시키는 능력.
    ii. 외부 세계(자기대상, 전이대상, 건강한 관계, 자연)와의 연결을 통해 강화되는 담아내는 능력.
    많은 사람은 대가가 되면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마르크스, 엥겔스, 펑더화이 장군, 장자, 소식 같은 비범한 인물들조차 여전히 수많은 고통과 혼란을 겪었고 운명에 짓밟혔다.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다만 고통에 삼켜지지 않고, 주체가 무너져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장자: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흐름에 순응한다.
    통제를 잃는다는 것은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억지로 통제하려는 것 역시 망념일 뿐이다. 통제 상실을 알아차리고 허용하는 것 자체도 담아내기다.
    알아차림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이 매일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들, 즉 휴식, 식사, 운동과 활동, 혈당 조절, 깊이 생각하기, 업장의 얽힘을 멈추기, 자성과의 연결을 회복하기에는 모두 높은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육조단경』: 앞선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이고, 뒤의 생각이 깨달으면 곧 부처다.
    매일 애쓰고 힘을 쏟는 일들은 흔히 수동적으로 하는 일이거나 스스로 번뇌를 자초하는 일이다. 알아차림의 정도가 높아지면 그 속의 업장 상태를 덜어낼 수 있다.
    하지만 알아차림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기가 중요하다. 알아차림이 높은 상태와 낮은 상태를 연결해 준다.
    (2) 업장 체계
    방어 복합체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은 자기가 감정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어서 취하는 응급조치다. 아기는 이불에 오줌을 싸는 일을 충분히 처리할 수 없다(무명의 업화). 포유류의 성장 속도에는 불일치가 있다. 본래의 온전함이 자기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방어기제(억압, 부인, 투사 등)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많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작용을 낳는다. 전쟁 때 남겨진 지뢰밭처럼 장애물, 즉 업장이 되는 것이다. 담아내는 능력이 강할수록 방어 체계는 덜 필요하다.
    업장 체계
    i. 내적 업장: 각종 방어, 해로운 반복 패턴, 소아 체계, 잘못된 인식 등.
    ii. 외부 세계(타인, 인터넷, 자본에 의한 소외)의 업장과 얽히는 것.
    가장 핵심적인 업장은 분명 역사적 유물론 차원의 객관적 업장이다. 봉건제, 관료제, 자본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도구화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소외 차원의 실존적 위기와 그에 수반되는 각종 방어 체계다. 유독한 존재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모든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했다.
    그릇 VS 쓰레기통: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역전, 타인에게 맞추는 성격과 구원자형 성격, 자발적인 쓰레기통. 자신이 지닌 그릇의 기능을 스스로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것은 심각한 자기 소외의 한 유형이다.
    (3) 업장의 얽힘 VS 빛의 연결
    담아내기 어려운 감각을 마주할 때, 감정에 삼켜지고 매몰되면서 자기가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자동으로 각종 방어기제를 응급 가동하고, 심지어 질 낮은 얽힘/관계를 통해 질 낮은 위안을 얻는 데 “익숙해지기”까지 한다. 이것이 업장이 처음 생겨나는 긍정적인 이유다. 업장이 외부 세계의 업장과 얽히며 악순환한다. 무지 속에서 침잠하다가 결국 망가지고 마에 빠진다.
    반면 자성의 빛이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충분히 알아차리고 담아내며,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빛이 외부 세계의 빛과 연결되면 선순환이 일어난다. 업장과 소아가 녹아 없어지고, 점차 치유되며, 자기가 튼튼해진다.
    앞선 글 「연결 VS 얽힘」.
    업장을 경외하기
    업장은 자신의 본래의 온전함을 가릴 수 있고, 타인의 본래의 온전함도 가릴 수 있다. 경외하며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4) 본래의 온전함
    기능적으로는 인본주의이며, 인간의 근원적 안정, 근원적 알아차림, 근원적 발달, 근원적 치유의 양식/기제다. 인간 심리 체계의 완전성, 자기 치유성, 발달성, 긍정적 지향성으로 드러난다.
    철학적으로는 인간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며, 인간의 본질과 본성이다. 인간의 이치이며, 도(우주의 법칙, 시간, 공간, 원자, 물리, 화학 등)의 한 고리이자 천인합일이다. 불교의 표현으로 말하면 진여는 어디에나 있고, 인간 안에서는 여래장이다.
    고차원적 감각, 근원적 감각
    자기 알아차림 능력, 높은 주파수의 상태(평온, 행복, 즐거움, 연결)를 알아차리는 능력
    알아차림은 결코 힘을 쏟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단이 아니라 결과다. 청정함과 선정에 드는 것은 정신적 성장의 결과다. 그러므로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노력은 허구의 개념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작동은 여전히 변증법적 유물론을 따른다.
  3. 인지 체계
    세계관·인생관·가치관에 관한 인식과 해석 체계다. 무의식과 의식이 함께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업장과 얽히고, 빛과 연결되면서 형성한 체계로, 의식 차원에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인지-리비도-자성 사이의 격차와 모순은 인간의 인지가 진화하는 기본 동력 중 하나다. 인간 내면의 자성은 줄곧 묵묵히 자신에게 인지행동치료를 하고 있고, 업장은 끊임없이 인지를 왜곡한다. 인지 체계의 모순과 긴장, 예를 들어 사회 밑바닥 사람들의 진선미 VS 거짓·추함·악함은 중년의 사람들이 마르크스와 장자를 통해 인지 체계를 재구성하고, 엉망으로 쌓인 코드 더미 같은 세계관·인생관·가치관을 다시 짜야 하는 이유다.
  4. 에너지 복합체
    에너지는 물질적이며 종합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신체의 건강과 활력, 심리의 건강과 활력, 일·생활·사교·감정에 쏟는 에너지, 좌절/보상, 기대 등이 모두 포함된다.
    내적 소모란 내면의 모순과 긴장으로 마음의 힘이 내부에서 소모되는 것이다.
    실연으로 몸과 마음이 낙담하고 무너진 사람이 연인에게서 다시 만나자는 문자를 받으면, 곧바로 온몸이 충전되어 에너지가 넘쳐난다. 에너지란 이처럼 종합적인 것이다.
  5. 리비도 복합체:
    전체 복합체: 감각 복합체-에너지 복합체-업장 체계-소아 체계-알아차림과 담아내기 복합체가 하나의 복잡한 정신적 동력, 마음의 힘(물결)으로 나타난다. 밀물 때는 바깥으로 쏟아지고, 좌절하면 썰물처럼 물러난다.
    이는 자기심리학에서 연구하는 “불안정한” “자기 구조”이기도 하다.
    전체 복합체가 상호작용하는 대상이 바로 운명이다. 운명은 곧 타고난 자질이고, 타고난 자질은 곧 운명이다.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
    소아 체계:
    소아는 거짓 자기와 비슷하다. 감정, 동일시, 반복 패턴, 고착 등의 기제를 바탕으로 생겨나는 복합적인 역할 정체성이다. 하지만 소아는 여럿이고, 서로 충돌하며, 갑자기 사라지거나 나타난다.
    불교의 제7식인 말나식은 끊임없이 살피고 헤아리기에 의식의 ‘의’라 불리며, 아집과 법집을 일으킨다. 융의 원형, 콤플렉스, “인격의 파편” 등도 모두 소아 체계와 자기 체계를 관찰한 것이다.
  6. 업장->깨달음->먼저 고요해지기
    업장이 줄어들수록 자기 돌봄 능력은 계속 커지고, 자성이 업장을 소화할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이라는 지점은 본래의 온전함을 느끼는 때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고요함”에 이른다. 깨달은 사람, 고요한 사람은 실제로 타인에게 이롭다. 「장자·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다」.
    이 진도는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수행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이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
    “먼저 고요해진 사람”이 “나중에 고요해질 사람”을 이끈다. 하지만 얼마나 이끌 수 있을지는 인연과 자연의 흐름에 달려 있다.
    깨달음에 관한 논의는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온전함을 느낄 수 있는가」, 「새로운 심리적 욕구 위계 모델」, 「내가 깨달은 뒤 두 번째 해」 등을 참조.
    마음의 철학이 이르는 종착점은 무심으로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있는 그대로인 것, 자연스러운 것,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