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장자 시리즈

자신에게 절망을 허락하기

절망은 평범한 감정이자 경험이다. 사람은 당연히 절망할 수 있다. 마르크스, 엥겔스, 반 고흐 같은 위인들도 절망을 느낀다. 하물며 사이버펑크 시대를 사는 평범한 우리, 개발도상국의 농촌 출신 아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절망은 분노와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건강하며, 사람들이 흔히 부정하고 회피하는 감정이다. 절망은 흔히 분노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연인이나 배우자, 부모, 상사에게 느끼는 분노와 절망이 그렇다. 절망 속에는 실상이 있고, 망상을 깨뜨리는 힘이 있다. 절망은 대타자, 크툴루의 한 귀퉁이를 보는 것이다. 절망은 좋은 것이다(모든 저조한 상태는 좋은 것이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며 반드시 거쳐야 할 수업 하나가 바로 절망이다. 다만 중년들은 역량이 부족하거나 대타자에게 굴복한 탓에 이 점을 명확히 짚어내지 못한다. 창업, 다음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퇴사하기, 전직, 이혼, 노라의 가출 등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제 하나가 바로 절망이다. 진정한 용자는 절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처했지만, 공자에게는 안회가 있었고 안회에게는 공자가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서로가 있었고, 소식에게는 형제와 벗과 제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소식도 절망한 적이 있다. 정말로 힘든 것은 반 고흐 같은 평범한 우리다. 우리의 동생은 테오이지 소철이 아니고, 벗은 고갱이지 회민이나 엥겔스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더 외롭게 하고, 자기 귀를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한다. 프롤레타리아도 절망하지만, 그들은 소박한 세계에서 살아가며 소박한 연결을 맺는다. 우리 같은 소규모·영세 자산가들의 업장, 크툴루가 그들에게는 없다. 반 고흐가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것은 그들이 부러워서였다.

절망은 건강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며, 해리, 우울, 유독성 수치심보다 가볍다. 후자도 모두 흔한데, 하물며 절망이야. 절망은 본래 누구나 지닌 미미한 존재라는 느낌의 일부이며, 크툴루에 대한 인간 지성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절망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잔혹한 불허다. 첫째로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로 진실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절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타인들은 더더욱 짙은 크툴루적 존재다. 혼란형 애착의 근원도 본래 이와 같다. 자신의 안전한 항구인 부모가 동시에 자신을 해치는 공포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절망을 허용하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사람만이 실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임을 허용하고, 무능하고 무위하며, 욕망도 구함도 없고, 자아도 집착도 없이 운명에 순응해야 비로소 절망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 고흐의 정신, 내내 절망하면서도 내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앞선 글 《1863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첫 다툼과 불화》, 《반 고흐에게는 마르크스와 장자가 필요하다》, 《용감한 노라》, 《노라의 가출 3: 반 고흐 증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