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사고로 손을 잃는 일을 통해 ‘아집’과 본래의 온전함을 이해하기—사고로 손을 잃은 사람도 여전히 온전한 사람일까?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장애가 있어도 인격이 온전하고 고결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많다. 팔다리가 곧 ‘나’는 아니라는 뜻이다. 팔다리도 내가 아니라면, 외모의 좋고 나쁨이나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고민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다. 평소에는 소유에 집착해 움켜쥐고 놓지 않지만, 이때는 손조차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장자·뜻밖의 사고로 손을 잃는 일을 통해 ‘아집’과 본래의 온전함 이해하기 한 사람이 뜻밖의 사고로 손을 잃었다면, 그는 여전히 온전한 사람일까? 물론이다. 장애가 있어도 인격이 원만하고 고결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많다. 이를 보면 팔다리가 곧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팔다리조차 내가 아니라면, 외모가 좋으냐 나쁘냐, 아름다우냐 추하냐를 두고 괴로워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다. 평소에는 소유하는 데 집착하며 꽉 움켜쥐고 놓지 않다가, 이런 때에야 손조차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고대의 병사나 농민공이 손을 잃더라도 여전히 온전한 사람이지만, ‘사회적 기능’을 잃어 사회에서 ‘도태’된다. 이를 보면 이른바 ‘사회성’과 ‘공명과 이익, 벼슬과 녹봉’은 그저 외적인 것이며, 인연에 따라 달라지는 겉모습일 뿐 인간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병사는 한때 원수가 되기를 꿈꾸었는데, 이때부터 ‘집착’과 ‘작은 나’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팔다리도 내가 아니고 사회성도 내가 아니다. 이를 보면 온갖 겉모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모두 작은 나의 집착이 일으키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임을 알 수 있다.
손을 잃은 고대의 병사는 오히려 전쟁과 포로 살해, 징집에서 벗어나 살아남았다. 여기서 운명의 복잡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의 ‘새옹지마, 복과 화는 서로 기대어 있다’는 지혜다. 운명은 무상하고 개인은 유한하며 무력하고 무위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도가 철학의 근본 가운데 하나다.
손을 잃은 고대의 병사가 오히려 깨달음을 얻어 원수가 되겠다는 꿈에서 벗어나고, 집착과 작은 나를 없애고, 소박한 참나를 되찾을 수도 있다. 그 자신과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로 인해 위안과 기쁨을 얻는다. 이를 보면 본래의 나를 되찾는 일이 손을 잃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을 잃은 고대 병사의 부모 역시 아들이 겪은 일의 전후를 지켜보며 자녀에 대한 집착과 작은 나를 없앴다.
손을 잃고도 마음을 내려놓아 공명과 이익, 벼슬과 녹봉에서 멀어진 사람은 오히려 홀가분하고 자유롭다. 그제야 이전의 분주함과 고된 노력이 자유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고된 노력을 멈추자 자유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이 어리석음이자 노동의 소외다.
손을 잃는 것이 이렇게 ‘좋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몸을 훼손하라고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력을 잃은 사람도 물론 자신과 화해하고, 눈과 보는 일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며, ‘비장애인’이 되어야 한다는 아집을 깨뜨릴 수 있다. 하지만 자기 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 어리석음을 깊이 느낀다. 공명과 이익, 벼슬과 녹봉, 사회성을 위해 밤을 새우고 과음하며 몸을 망가뜨리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의 ‘성명’, 곧 본성과 생명에 관한 가르침이 비판하는 일이다.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장자』 「양생주」: 선을 행하되 명성에 가까이 가지 말고, 악을 행하되 형벌에 가까이 가지 말라. 가운데의 길을 따라 늘 지켜야 할 도리로 삼으면 몸을 보전하고, 생명을 온전히 하며, 부모를 봉양하고, 타고난 수명을 다할 수 있다.
손을 잃는 일을 통해 세계관·인생관·가치관의 여러 측면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장자』 전편에서 장애인을 사례로 자주 드는 이유다.
어떤 수행이든, 특히 도가와 불교의 수행은 먼저 꿰뚫어 보고, 덜어 내며, 아집을 깨뜨리고, 겉모습과 세속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한다. 덜고 또 덜어 무위에 이르면, 남는 것은 본래의 나이며, 고요하고 즐거워 근심도 걱정도 없다. 마음을 비우는 심재, 앉아서 자신을 잊는 좌망, 빈 방에 밝음이 깃드는 허실생백이다.
『장자』 「경상초」 편은 주로 수행을 이야기한다.
뜻을 어지럽히는 것을 걷어 내고, 마음의 얽힘을 풀며, 덕에 짐이 되는 것을 없애고, 도를 가로막는 것을 뚫어라. 고귀함·부유함·현달함·위엄·명성·이익, 이 여섯 가지는 뜻을 어지럽힌다. 용모·행동·안색·이치·기운·의도, 이 여섯 가지는 마음을 얽히게 한다. 미움·욕망·기쁨·분노·슬픔·즐거움, 이 여섯 가지는 덕에 짐이 된다. 떠남·나아감·취함·줌·앎·능력, 이 여섯 가지는 도를 가로막는다. 이 네 무리의 여섯 가지가 가슴속을 뒤흔들지 않으면 바르게 되고, 바르게 되면 고요해지며, 고요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비워지며, 비워지면 무위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도는 덕이 우러르는 것이고, 생명은 덕의 빛이며, 본성은 생명의 바탕이다. 본성이 움직이는 것을 행위라 하고, 행위에 인위가 끼어드는 것을 본성을 잃음이라 한다. 앎이란 사물과 접하는 것이며, 앎이란 헤아리는 것이다. 앎으로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곁눈질로 보는 것과 같다. 부득이하여 움직이는 것을 덕이라 하고, 움직임에 자기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없는 것을 다스림이라 한다. 이름은 서로 반대이지만 실상은 서로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