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장자 시리즈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 개념 발전사

여래장,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 개념이 흥기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다
모든 사람에게는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 즉, 누구나 평등하고 원만한 깊은 지혜를 지니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장자, 선종, 인본주의의 철학적 기초이자 공리다. 앞선 글 《인본주의 VS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와 1844년 수고에 관한 한 가지 핵심》
여래장,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 개념이 흥기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다.

  1. 불교에는 몇 차례 큰 전환점이 있었다
    A. 초기:
    원시불교(아함경) -> 근본분열(부파불교). 핵심 교의는 사성제, 팔정도, 연기론, 삼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다.
    B. 대승·소승 불교 시기:
    용수 스님을 주요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은 초기 대승으로, 반야경, 화엄경 등의 경전이 있었다. 반야경은 연기성공, 즉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며 그 본성은 공하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용수 스님의 사상은 공과 유 어느 한쪽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곧 중도라는 것이다. 용수 스님 이후 중관과 유가유식이라는 두 큰 학파가 형성되어 공과 유, 성과 상의 문제를 계속 논의했다. 유가유식종에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관념론을 세우려는 야심도 생겼다. 오직 식만 있고 외부 대상은 없다고 설명하며, 제8식인 ‘아뢰야식’을 ‘종자식’으로 삼아 만법이 전개된다고 보았다.
    이후 아뢰야식이 참된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를 둘러싸고 다시 두 파로 갈라졌다. 또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대승기신론》이 ‘일심이문론’으로 양자를 조화시켰다. 하나의 마음에 진여문과 생멸문이라는 두 문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 불교의 한 토대가 되었다.
    C. 여래장의 출현은 또 하나의 큰 전환점이다
    모든 사람에게 여래장이 있다. 여래장이란 불성, 부처의 본질, 원만한 지혜, 법신으로, 청정하며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훗날 선종의 핵심이 되었으며, 오늘날 흔히 쓰는 표현으로는 본래의 온전함이다.
    이 설명은 인도와 중국에서 모두 큰 환영을 받았다. 간단명료하고 밝으며 ‘실재감’이 있고, 이론적으로도 앞서 있으면서 실천에도 매우 유용하다. 사람에게 큰 자신감을 주는 동시에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더는 구할 것이 없게 한다. 선종은 바로 이 정수를 붙잡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는, 비교적 진보적인 인본주의 이념도 담겨 있다. ‘참된 나’를 암시하는 이런 설명은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범아일여, 나아가 윤회하는 영혼과 혼동하기 쉬웠고, 일반 백성들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도가의 도가 만물을 낳는다는 생각, 천인합일과 맞아떨어져 독서인들에게 환영받았다.
    여래장의 가장 이른 기원은 원시불교의 아함경에 나오는 ‘청정심’이며, 이후 불교의 여러 개념과 융합되었다.
    첫째는 ‘연기성공 이론’에서 파생된 ‘법성, 진여’다. 추상적인 측면에서는 도와 비슷하지만, 도가는 소박한 유물론이므로 성공 이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둘째는 불과, 불성, 곧 보리다. 이는 하나의 ‘종점’에 관한 문제다. 마음의 종점은 ‘보리’이고, 이치의 종점은 ‘열반, 진여’다. 동시에 하나의 ‘출발점’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과 진여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이는 곧 누구에게나 보리심이 있는가 하는 문제다.
    셋째는 유식종의 핵심 개념인 두 가지 전의다. 이 역시 위에서 말한 보리와 열반의 문제로, 제8식을 오염과 청정의 의지처로, 진여를 미혹과 깨달음의 의지처로 삼는다.
    넷째는 ‘여래장아’다. 불교의 ‘무아’는 비교적 추상적이어서 일반 대중도 받아들이기 어렵다(오히려 영혼불멸과 인과윤회라는 힌두교 이념이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불교 밖의 대중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결국 하나의 ‘주체’를 더했는데, 그것이 바로 ‘여래장아’다.
    이 개념들에는 모두 수많은 논쟁과 변화가 얽혀 있지만, 점차 융합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나는 이 한마디로 불경의 절반 이상을 ‘재치 있게’ 비켜 갔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장자를 닦는 사람이라 이렇게 극도로 간결하다. 능력은 한정되어 있고, 앎에는 끝이 없지만 삶에는 끝이 있으니까). 법성, 진여, 보리, 열반, 종자식, 여래장, 여래장아 등의 개념이 점차 융합되는 과정은 사실 ‘모든 법은 공한 모습이며,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다’는 원시불교 본래의 참뜻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능가경》에서는 진여, 여래장, 제8식을 모두 융합했다. 그리고 능가경은 바로 달마대사 시대에 중점적으로 강설했던 경전이자 선종의 근원 중 하나다. 여래장 개념은 줄곧 선종의 핵심이었으며, 《육조단경》에는 이것이 아주 분명하게 적혀 있다. 오조가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명하다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혜능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말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자성에 본래의 온전함이 있는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흔들림이 없는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자성이 만법을 낳을 수 있는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무념·무상·무주’의 돈수 방법을 제시했다.
  2. 선종의 융성은 끊임없는 개선의 과정이었다
    초기 달마의 두타고행은 떠돌며 걸식하고, 정해진 거처 없이 산림에 홀로 머무는 것이었다. 여건이 고되고 관청에서도 배척했기에 널리 전파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산림 고행 덕분에 수행의 진정성이 더욱 두드러졌고, 다른 수행자들과 비교하면 그 수행의 깊이도 더욱 돋보였다.
    동산법문의 사조와 오조 시기에 선종은 융성하기 시작했다. 첫째, 이런 두타고행을 개선하여 승원과 도량을 세웠다. 이는 난세가 끝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 ‘문자를 세우지 않고 가르침 밖에서 따로 전한다’는 방식을 개선하여 불경의 문자에 더 많이 의지했다. 여기에 선과 계율의 일치가 더해져 수행 방식이 마련되면서 더 쉽게 보급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이 역시 난세가 끝나고 나라가 통일되면서 남북의 불교가 교류하기 시작하고, 선종이 경전의 가르침에서 더 많은 영양을 흡수한 결과다). 이후 금강경, 반야심경처럼 더 간결하고 명료한 불경이 유행한 것도 이런 흐름의 표현이다. 혜능은 이 시기의 집대성자다. 이 측면에서 보면, 이후의 ‘돈오와 점오’, ‘돈오점수’ 등의 논쟁은 모두 방법에 관한 논쟁이지 선종의 근본에 관한 논쟁은 아니다.
    예전에 나는 ‘문자를 세우지 않고 가르침 밖에서 따로 전한다’, ‘돈오’, ‘본래의 마음에 곧바로 이른다’는 것을 혜능이 ‘발명’했다고 잘못 생각했고, 신수는 악역이라고 여겼다. 선종사를 조금 읽고 나서야 이것이 문외한의 오해이자 후대 사람들이 단경을 고치고 변조한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단경이 고전이라는 사실에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장자 잡편에 나오는 일부 억지스러운 해석이 장자 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누구에게나 여래장이 있으니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여래장에 관해서 혜능은 반야공성 쪽으로 더 기울었고, 그에 따라 ‘유식종’의 훈습, 종자, 전의, 삼성, 관념론적 요소를 일부 덜어내고 돈수의 이념을 강화했다. 그러나 여전히 선과 계율을 함께 중시했으며, 완전히 자연에 맡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점수의 ‘오래된 습관’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지금 ‘익숙하게 아는’ 선종, 즉 본래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고, 닦아 고칠 필요가 없으며, 평상심이 곧 도라는 선종은 남종의 마조도일이 혜능을 바탕으로 다시 개선한 형태다. 여기에 누구에게나 여래장이 있고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는 생각이 더해졌다. 이로써 불교를 극한까지 ‘간소화’했으며, 사실 불교의 참뜻에도 더 가까워졌다. 남종은 불교의 경로를 통해, 장자를 현학적으로 해석한 우두종과는 서로 다른 길을 거쳐 같은 곳에 이르렀고, 둘 다 ‘닦지 않음을 닦음으로 삼는’ 방법으로 나아갔다.
    마음은 본래 청정하므로 닦아 고칠 필요가 없고,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다. 마음을 편히 놓고 평소에 별일 없이 지내며,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행동하듯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곳곳에 선의 뜻이 있다. “마음이 평온한데 어찌 애써 계율을 지키랴. 행실이 바른데 어찌 선을 닦아야 하랴.” “본래 얽매임이 없으니 풀려나기를 구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쓰고 곧바로 행하면, 이에 견줄 것은 없다.” 백거이가 마조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구한 뒤 쓴 시도 이와 같다. “도모하는 바가 있으면 궁극의 뜻이 아니요, 집착이 없는 것이 참된 종지다. 또한 부지런히 도를 닦더라도 여전히 망상 속에 있을까 염려된다.” 공하되 공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부처와 용수 스님이 말한 중도의 본뜻이다. 이러한 자연스럽고 한가로운 태도는 장자와 더욱 잘 맞아떨어진다.
    당나라 말기부터 중국에서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고, 오대십국 시대에는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듯한 참상이 벌어졌다. 선종과 율종은 극도로 간결했기에 전승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3. 나 개인의 이해
    내 경험으로 볼 때, 본래의 온전함은 실천에 매우 유용하고 명확한 수행의 이정표이며, 지금 내가 사람을 사귈 때 상대를 가리는 기본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본래의 온전함이라는 철학적 정의는 조금 모호하다.
    나 개인적으로, 내가 믿는 마르크스주의와 장자를 결합하고 서양철학사와 불교사의 틀을 함께 놓고 보면, 유식종의 관념론과 융합된 여래장 이론은 모든 법이 공하다는 ‘허무성’에 다소 어긋난다. 즉, 보리심=공성이라는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보리심은 인간 ‘인식’의 ‘종점’이자 ‘출발점’으로(도가의 표현으로는 진인이다), 그저 하나의 인식 상태, 인식의 경지이며, ‘모든 법이 공하고 모든 법에 자아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용수 스님의 ‘중관’ 사상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마조의 선종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제시한 것은 모든 법의 공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선종 역시 갈수록 반야의 공관을 중시하게 되었다.
    우주는 물리와 ‘진리’의 차원에서 통일되어 있으며 인간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곧 ‘절대진리’, 또는 ‘도’다. 도가의 말로 하면 천인합일이지만, 인간은 ‘천인합일임을 깨닫는 것’에 이를 수 있을 뿐, ‘천인합일’ 자체(불교에서는 진여, 모든 법의 평등함)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인간은 결국 한 사람의 인간이다. 원자 하나, 한 줄기 빛, 나무 한 그루, 나비 한 마리에 아무리 공감하려 해도 마찬가지다. 보리심, 곧 도가의 진인은 현묘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이다. 우리는 나무, 나비, 헤엄치는 물고기를 본떠 살아가며 망상하지 않고 청정하고 자연스럽게 지낼 뿐이다. 좀 더 거칠게 말하면, 세계는 유물적이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 선종이 후대로 나아가면서 그 핵심은 반야공성+여래장의 본래의 온전함이 되었다. 사실 이는 도가의 천인합일, 극도로 간결하고 청정하며 자연스러운 태도와 매우 비슷해졌다. 물론 중국 선종과 장자의 현학은 실제로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예컨대 우두종의 역사, ‘정이 없는 존재에도 불성이 있다’는 주장과 ‘천인합일, 도는 똥과 오줌에도 있다’는 말의 유사성(물론 그 핵심은 여전히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이다)]. 하지만 양자의 맥락을 각각 분석해 보면, 서로 다른 길로 같은 곳에 이르렀으며, 결국 모두 이 하나의 결과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선과 장자는 중국인, 특히 중국 독서인들의 삶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백거이의 “달마는 마음을 전해 생각을 쉬게 하고, 현원은 뜻을 남겨 세상 티끌과 하나 되게 했네”, 유종원의 “온갖 소리는 모두 인연 따라 생겨나니, 아득히도 소란 속에서 고요하네. 마음과 경계는 본래 한결같으니, 새가 날아도 자취를 남기지 않네”는 장자의 온갖 소리가 잠잠해지는 고요함과 선종의 연기성공을 함께 써낸 것이다. 소식, 왕안석, 신기질 등 송나라의 수많은 고결한 선비들도 선과 장자를 함께 닦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너무 많이 따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원시불교가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피했던 생각과 같다. 원문의 대략적인 뜻은 이렇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면 화살 상처와 독성을 모두 치료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반드시 누가 어떤 활로 어떻게 이 화살을 쏘았는지, 독의 배합은 무엇인지, 회복의 원리는 무엇인지까지 알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좀 유난을 떠는 셈이다. 마음의 빈방에 밝음이 생겨나면 그만이다. 그 밝음이 여래장인지, 보리인지, 진여인지는 따지지 말고 그저 수행하면 된다. 마음의 빈방에 밝음이 생겨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가는 도중에 이미 행복하고 즐거우며 지극한 즐거움을 누려 더 바랄 것이 없어진다.
    남종은 결국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으로 나아갔다. 장자는 평범한 사람, 장애인, 장인을 자주 쓰고, 쓸모없는 나무와 헤엄치는 물고기와 나비를 쓰고, 열자가 집으로 돌아가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이야기를 썼다. 이것이 바로 꾸밈없는 본바탕을 드러내고 소박함을 품는 도가의 이념이다. 여기에는 사실 계급 문제도 있다. 즉, 중상층은 탐욕·성냄·어리석음·망상에 의해 더 많이 소외되고, 하층은 노동에 의해 더 많이 소외되지만 마음에는 소박한 본색이 남아 있다. 이것 역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선진성의 일부다. 단경에서도 “가장 낮은 사람에게 가장 높은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혜능 자신도 글을 모르는 농민으로, 땔나무를 팔고 방아를 찧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 역시 이 점을 부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