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주의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 관한 한 가지 핵심
一、인본주의는 당연히 마르크스주의의 일부다
마르크스주의는 분명 인본주의적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며 인간에게는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고 보고,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며, 인간 본성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고자 한다. 공산주의란 노동도 자연스럽고 향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 프롬이 매우 훌륭하고 명쾌한 해석을 제시했다. 인본주의가 만인의 평등의 내적 차원이라면, 공산주의는 만인의 평등의 외적 차원이다.
마르크스의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원문:
“공산주의는 사유재산, 즉 인간의 자기 소외를 적극적으로 지양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인간의 본질을 진정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사회적 인간, 즉 인간다운 인간에게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로서 인도주의와 같고, 완성된 인도주의로서 자연주의와 같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순을 진정으로 해결하는 것이며,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증, 자유와 필연, 개인과 유 사이의 투쟁을 진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자본론》의 서문도 ‘고통받음’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으로 고통받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미발전으로도 고통받는다. 산 자들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二、그러나 일부 소련식 해석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와 인본주의를 대립시킨다
첫 번째 측면은 철학사와 이데올로기의 관점이다.
- 포이어바흐·헤스식 ‘인도주의적 공산주의’와 의도적으로 대립시킨다
후자를 간단히 말하자면, 선전과 교육을 통해 인간성을 되찾으라고 호소하고, 모두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공산주의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소시민적 관념론이자 엘리트주의이며, 유물사관이나 민중사관이 아니다.
물론 청년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의 단계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아갔으며, 이는 1842~1844년에 일어난 중요한 전환이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포이어바흐가 마르크스 본인에게 미친 영향을 과장하고,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엥겔스의 경험 일부를 마르크스에게 대입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 자신의 인본주의와 유물론의 토대 및 발전 맥락을 간과했다. 에피쿠로스와 프랑스 유물론, 그리고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의 변증법이 바로 그 맥락이다. 이는 마르크스 본인에 대한 조잡하고 잘못된 이해다.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의 인본주의 사상까지 ‘인도주의적 공산주의’로 취급해 버린 것이다. “더러운 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셈이다.
-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한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0월 혁명 이후의 레닌주의적 폭력혁명 계열로, 서유럽과 동유럽의 공산당들이다. 그중 일부는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를 많이 따르며 제3인터내셔널화, 종속화, 수정주의화되었고, 다른 일부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돌아갔다. 둘째는 영구혁명 계열로, 대표적인 것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다. 수십 년에 걸친 제4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의 투쟁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대표되는 서유럽 상아탑의 사회학자들로, 비교적 소시민적 성격이 강하다.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나치 시기에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들은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지식인들이었다. 이 학파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를 높이 평가한다.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이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은연중에 폭력혁명에 반대하며 청년 마르크스를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맞서려 한다.
이 세 부류는 모두 소련식 마르크스주의 진영이 배척한 대상이며, 심지어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자체까지 배척했다.
두 번째 측면은 소시민의 폭력혁명 반대에 관한 것이다.
소시민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서 반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폭력혁명이다. 그래서 소시민적 마르크스를 내세워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마르크스에 반대한다. 엥겔스가 말년에 폭력혁명을 포기했다는 식의 글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후난 농민운동 시찰보고》에는 “어떤 사람은 아주 잘됐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엉망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소시민은 흔히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폭력혁명과 ‘과격한 행위’를 비판한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대혁명과 각종 혁명에서 벌어진 ‘과격한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즈후의 인기 질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즈후에도 훌륭한 답변이 이미 있다. 간단히 말해, 수십억 프롤레타리아는 인간성을 원하고 1억 소시민은 ‘인도’를 원하며, 수십억 프롤레타리아는 평등한 대우를 원하고 1억 소시민은 ‘공정’을 원한다.
세 번째 측면은 어두운 면, 즉 소련식 관료주의가 인간성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복종론, 도구론, 길들이기론, 주입론, 절대적 평등에 대한 반대 등은 레닌주의를 왜곡한 것으로,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를 ‘소시민적’인 것으로 몰아 억압한다.
정리하자면, 위의 세 측면은 모두 소시민을 겨냥한 것이기에,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소련식 해석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와 인본주의를 대립시킨다.
二、인류는 전면적이고 완전한 인본주의를 본 적이 없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체계에서 인본주의는 중요한 ‘가설’이지 ‘공리’가 아니다.
인류 문명은 초기 단계에 있다. 인류는 대다수 사람의 전면적 발전을 허용하는 사회, 대다수 사람이 보편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선한 인간성의 전면적 발전’에 도달하도록 하는 사회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가설’일 뿐이며, ‘증거를 내놓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을 돌보는 교육, 사랑의 보살핌, 동물의 선행, 인간성의 빛나는 모습, 특히 평범한 노동자들의 소박한 진선미 등의 측면에서, 또 인본주의 심리학·교육학·경영학의 실천 속에서 곳곳에 인본주의가 ‘보인다’. 즉 인본주의라는 ‘가설’은 곳곳에서 검증되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거나 일부 사람이 우월하다는 가설은 곳곳에서 부정된다.
실제 생활에서 인본주의는 비교적 높은 수준의 인식이며, 소시민 사이에서는 드물다. 사회주의자가 반드시 인본주의자인 것은 아니지만, 푸리에와 오언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그 예다. 인본주의자는 반드시 사회주의자이며, 헤스와 포이어바흐 등의 공상적 공산주의가 그 예다. 인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한 단계 높은 인식임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인본주의자는 이른바 노력이나 재능을 높이 떠받들지 않고, 인간의 전면적 발전을 제한하는 외부 요인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프롬과 호나이를 대표로 하는 심리학계의 ‘사회문화학파’가 그렇다. 즉 “사람이 병든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성이 완전해진 모습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반인간적인 것과 억압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 인류가 인간을 억압하고 예속시키며 제한하는 모든 것, 현재로서는 주로 사유제를 타파해야만 ‘진정한 인간성’을 볼 희망이 생긴다. 25세기가 되면 어쩌면 인터내셔널이 실현되어, 인류는 자신의 전성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三、마르크스가 직접 말하는 인본주의 심리학
다음은 모두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의 발췌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내 나름의 해석은 적게 보탰다.
(一)마르크스가 말하는 ‘무용지용’(장자)
공산주의에서 사유제의 적극적 지양, 인간이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생명, 대상적 인간과 인간의 생산물을 감각적으로 전유하는 것을 그저 직접적이고 일면적인 향유나 소유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현실성이 실현되는 것이며, 인간의 능동과 수동이다. 인간적 의미로 이해한 수동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유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전면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온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전면적인 본질을 전유한다.
사유제는 우리를 너무나 어리석고 일면적으로 만들어, 어떤 대상이 우리가 사용하는 것, 즉 직접 사용하거나 자본으로 소유하는 것이어야만 우리의 것이 되게 했다. 사유제는 이 모든 것을 그저 생활 수단으로만, 사유제 아래의 자본과 노동에 봉사하는 수단으로만 본다. 그리하여 모든 육체적·정신적 감각은 이 모든 감각이 단순히 소외된 형태인 소유 감각으로 대체된다. 인간의 본질은 이러한 절대적 빈곤으로 환원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내면의 풍부함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의 지양은 인간의 모든 감각과 특성을 완전히 해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양이 해방인 이유는 바로 이 감각과 특성들이 주체의 측면에서도 객체의 측면에서도 인간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눈은 인간의 눈이 되고, 편협한 눈은 해방된 완전한 인간의 눈이 된다. 욕구와 향유는 이기적 성격을 잃고, 자연은 순전히 유용하기만 한 성격을 잃는다. 효용이 인간적 효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무용지용’이다. 타인의 감각과 향유도 내가 전유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직접적인 기관들 외에도 사회적 형태로 사회적 기관들이 형성된다. 이타주의, 사회의 통일성이다.
(二)인간의 욕구 단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매슬로의 욕구)
대상적 현실이 사회 속에서 인간에게 어디서나 인간의 본질적 힘의 현실이 됨에 따라, 모든 대상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대상화가 되고, 그의 개성을 확증하고 실현하는 대상, 그의 대상이 된다. 이는 대상이 인간 자신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야 인간은 자신의 대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대상이 인간에게 사회적 대상이 되고, 인간 자신이 스스로에게 사회적 존재가 되며, 사회가 이 대상 속에서 인간에게 본질이 될 때에만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
음악적 감각이 없는 귀에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대상이 나에게 지니는 의미는 나의 감각이 미치는 범위에 한정된다. 따라서 사회적 인간의 감각은 비사회적 인간의 감각과 다르다. 조잡한 실용적 욕구에 갇힌 감각은 제한된 의미만을 갖는다. 근심에 짓눌린 가난한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광물을 파는 상인은 광물의 상업적 가치만 볼 뿐, 광물의 아름다움과 특성은 보지 못한다. 그에게는 광물학적 감각이 없다.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의 세계사 전체가 낳은 산물이다. 인간 본질의 풍부함이 객관적으로 펼쳐짐으로써 비로소 주체적이고 인간적인 감각의 풍부함, 이를테면 음악적 감각을 지닌 귀와 형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눈, 한마디로 인간의 향유가 될 수 있는 감각, 즉 자신이 인간의 본질적 힘임을 확증하는 감각이 일부는 발달하고 일부는 생겨난다. 오감뿐 아니라 이른바 정신적 감각과 실천적 감각, 의지와 사랑 등도, 한마디로 인간의 감각과 감각의 인간성도 오직 그 대상의 존재를 통해, 인간화된 자연을 통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인간의 감각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본질과 자연 본질의 모든 풍부함에 상응하는 인간의 감각을 창조하기 위해,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인간 본질의 대상화가 필요하다.
사유재산과 그 부유함 및 빈곤함의 운동을 통해 생성 중인 사회는 이러한 형성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발견한다. 우리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유심론과 유물론, 능동과 수동, 즉 자유의 문제가 오직 사회적 상태에서만 서로의 대립을 잃고, 따라서 그러한 대립물로서의 존재도 잃는다는 것을 본다.
이론적 대립 자체의 해결은 오직 실천적 방식으로, 인간의 실천적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단지 인식의 과제가 아니라 현실 생활의 과제다.
(三)‘일면적 심리학’과 ‘완전한 심리학’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과학적 인본주의 심리학)
산업의 역사는 인간의 본질적 힘에 관해 펼쳐진 한 권의 책이며, 감각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인간의 심리학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심리학을 인간의 본질과 맺는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못했다. 사유제의 소외 범위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정치, 예술, 문학 등을 포함하는 일면적이고 소외된 현상만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며, 인간의 대상화된 본질은 소외된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러한 심리학은 내용이 풍부한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다. 인간 노동의 이 거대한 부분을 제외해 버리기 때문이다.
주: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를 이번에는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끝까지 읽었다. 인류 최고의 철학자란 이런 것이다. 마르크스와 장자는 늘 내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한다. 예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내 수준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는 소외에 관한 글만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운동, 인본주의, 공산주의, 자연주의, 존재론, 변증법 등에 대한 완전하고 체계적인 논의이기도 하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가 보여 주는 철학적 완성도라면 엥겔스도 감탄하며 인정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엥겔스와 동시대의 엘리트들, 특히 포이어바흐가 이론적으로 마르크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듯 보였지만, 이때부터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