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욕은 사실 정복당하는 데 대한 복종이다
정복욕은 사실 복종이자 정복당하는 것이다.
一、남성의 정복욕은 사실 복종이자 정복당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와 일에서 정복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기호다.
남녀 관계에서 정복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기호다. 여성을 사물화하는 것은 더더욱 자신을 사물화하는 일이다.
그것은 외부 시스템, 사회, 대타자가 설정한 규율의 기호이자 KPI다.
대타자의 가치관에 복종하고, 크툴루의 요구에 복종하는 것이다.
정복하며 바깥에서 구하는 자는 세상의 거지다.
二、복종, 비겁함, 잔인함
복종하면 자유, 사유, 주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크툴루를 직시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무너지고,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 정복할수록 결핍은 더 커지는 악순환이다.
정복의 본질은 토너먼트에서 동류를 이기는 것, 곰 앞에서 동류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다. 동류를 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적으로 삼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반인본주의적이며 인간성의 근본과 연결이 끊어진다. 엥겔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적으로 삼는 시대.
정복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바로 복종과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이다.
정복의 과정은 열등감과 자만의 환상, 자기 자신을 향한 심리적 조종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며, 자기 공격과 자기 파괴, 해방에 대한 환상이 악순환하는 과정이다.
자신에게 잔인하고, 타인에게 잔인하다.
수많은 동아시아 소년들은 가문을 빛내고 괴물을 물리치며 레벨을 올리는 노선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으며,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타인을 사물화한다.
소규모·영세 자본가들의 복종과 소외, 우경화의 정도가 이토록 깊으니, 1930년대 독일·일본·이탈리아처럼 나치로 기우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三、다투지 않음, 따름, 자연스러움, 피어남
마르크스주의에서 불복종은 해방이다(프롬의 『불복종에 관하여』). 도가의 다투지 않음은 곧 불복종이며, 타고난 본성과 자연스러움을 따르고,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인위적인 망동을 걷어 내는 것이다(『장자·대종사』: “내가 하늘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 아니며, 인간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하늘의 일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또한 참된 사람이 있은 뒤에야 참된 앎이 있다. 무엇을 참된 사람이라 하는가? 옛날의 참된 사람은 적다고 거스르지 않고, 이루었다고 뽐내지 않으며, 일을 꾀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도 후회하지 않고, 마땅하게 이루어져도 자만하지 않았다.”). 도가에서 말하는 순복은 맑은 정신으로 운명에 순복하는 것이지만, 몽매한 복종은 소외를 낳는다.
타인이 뜻을 이루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외적인 성취이며, 그래야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 스스로 뜻을 이룬 사람만이 타인이 뜻을 이루도록 도울 능력이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수준은 그가 타인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수준의 상한선이다. 강인한 남자다움은 자신과 타인을 향한 잔인함이 아니라, 인격의 빛과 굳셈이다.
앞선 글: 「남성의 자기 대상화: 숭배받기,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p.s. 적지 않은 여성들이 각성하고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남성을 배워 돈을 벌고 정복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한 형태의 사물화에서 다른 형태의 사물화로 나아가는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자신들이 혐오하는 남성의 논리에 동조하는 것이며 진정한 각성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