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과의 대화—‘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서문: 최근에 쓴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노력하는 순간 어긋난다, 자연스러움에 맡겨라》와 《새로운 작은 자아의 탄생: 수행자라는 작은 자아》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자 새로운 전환점이다. 2024년 4월 장자를 통해 ‘깨달은’ 이후, 또 한 번의 새로운 깨달음이자 화해라고도 할 수 있다.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라는 말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사상 체계 전체와도 관련되어 있는데, 예상보다 누리꾼들의 공감과 반응이 괜찮아서 꽤 위안과 힘을 얻었다. 이 글의 대화는 그 생각을 구체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누리꾼 A:
안녕하세요. 하나 여쭤보고 싶습니다. 노력하는 순간 어긋난다면, 평소에는 어떻게 정진해야 할까요?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무위에 이르도록, 그저 덜어내는 것만 해야 하는 걸까요? 감사합니다.
쑤훠이:
一、도를 추구하면 날마다 덜어낸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질문하신 분도 장자를 진지하게 공부하고 실천하고 계시다는 게 느껴집니다. 현재 제 이해도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도를 추구하면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도가에는 노력이라는 말이 없고, 장자에게도 수행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현재 저는 ‘좌망과 심재’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二、좋은 상태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 흔히들 정진이라고 하는 명상, 호흡, 좌선, 생각 관찰이 정말 그렇게 신비로운 것일까요? 저는 그것들이 그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2. 저는 매일 자연스럽게 공원을 거닐고 운동을 합니다. 테니스를 치고, 농구를 하고, 산책을 하지요. 심지어 자연스럽게 호흡을 늦추고 멍하니 있으면서 그 안의 고요함과 즐거움, 마음챙김을 누립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자기 관리이고 노력일 테지만, 제 입장에서는 노력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배가 70퍼센트쯤 찰 때까지만 먹고 식사할 때 휴대전화를 보지 않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가혹할 만큼 철저한 자기 관리로 보이겠지만, 실은 몸과 마음의 본능이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학업이나 일, 무언가를 해내는 일도 사실 다들 아시듯 마음챙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제 이해는 이렇습니다. 좋은 생활 방식은 모두 인간의 본능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본능을 거스른다는 데 있습니다. 장자의 말로 하자면, 인위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三、이것이 노력의 결과일까?
다시 이론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런 ‘효과’에 도달한 것이 제가 ‘노력’한 결과일까요? 다른 사람도 ‘노력’해서 이런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제가 노력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운명’의 몫이 더 큽니다. 제가 팔자가 좋다거나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은 늘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그때 농촌 초등학교에 함께 다니던 친구들은 지금의 저 같은 상태에 이르지 못했고, 테니스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들이 ‘노력하지 않아서’일까요? 소식은 “강산과 바람과 달에는 본래 정해진 주인이 없으니, 한가로운 사람이 곧 주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면서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아서일까요? 오히려 바로 그 노력 때문에 한가로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四、허용하고 맞서지 않기, 운동과 공부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노력이 필요 없다
다시 구체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면, 수행에 관한 모든 생각을 내려놓은 뒤로 훨씬 편해졌습니다. 특히 더는 잡념이나 부정적인 상태, 감정과 맞서지 않고 평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애쓰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그저 더 자연스러워진 것뿐입니다.
운동은 아주 좋은 비유입니다. 이미 운동하는 삶에 들어선 사람은 더 이상 ‘노력’해야만 운동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이른바 ‘노력’으로 자신을 독려해 운동하게 하는 것은 흔히 불안과 자기 공격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운동에 필요한 본연의 활력에서 사람을 더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공부를 잘하는 데에는 사실 그리 ‘힘이 들지’ 않으며,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제 중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공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부분도 있었고, 줄곧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게 노력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자주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거나 담을 넘어 PC방에 가서 밤을 새운 탓에 컨디션에 영향을 받기도 했고, 일부 과목이 취약해서 ‘노력’하며 독학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른바 노력은 그저 업장의 영향일 뿐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해도 별다른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갈 뿐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래의 온전함입니다.
현재 제 이해는 이렇습니다. 저도 이제 막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기에 아직 오랜 기간 실천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방향이 옳다고 느끼며, 장자뿐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수행’을 하지 않았고, 그들 역시 자주 고통스러워하고 어쩔 수 없어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과 경지까지 의심해야 할까요?
五、‘수행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도 똑같이 행복하고 즐겁고 성취를 이룬다
‘수행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도 똑같이 행복하고 즐겁고 성취를 이룹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수행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아인슈타인도 호흡 수련을 하고 좌선을 했을까요? 아니면 바이올린을 켜며 자기 상태를 조절하려고 ‘노력’했을까요? 버핏은요? 좌선도 하지 않고 경전을 베껴 쓰지도 않고 운동도 하지 않는데, 콜라까지 마십니다.
업장이 깊지 않은 사람은 학업, 일, 사회적 관계, 몸, 마음이라는 다섯 요소가 자연스럽게 선순환합니다. 이를 팔자가 좋다고 하는 것이지요.
六、애써 알아차리지 않으면 알아차림이 줄어들까?
이것은 흥미롭고도 핵심적인 지점입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핵심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노력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아도 알아차림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었습니다. 참 흥미로우면서도 역설적이지 않나요?
사실 이 논리 전체를 쉽게 풀어 말하면, 일을 하는 것도, 발전하는 것도, 알아차리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며, 인간 본연의 본능이므로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누리꾼 A:
맞아요, 맞아요. 이루려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 작은 자아의 노력이 되어버리더라고요. 제 경험도 그래요. 사실 글을 읽고 정말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저는 줄곧 생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왔는데, 예전에는 자주 ‘노력’하며 의도적으로 연습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그것도 제가 집착하는 무언가가 되어 ‘자아’를 강화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어떻게 무위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 내려놓는 것이 어쩌면 무위가 아닐까 느낍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평소의 잡념이나 부정적인 감정은 어떻게 내려놓으셨나요? 저는 늘 마음에 맺힌 응어리와 불안감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즐거워지기가 참 어렵습니다.
쑤훠이:
一、업장에 맞서지 않고, 내버려 두기
마음의 응어리, 불안감, 즐겁지 않은 마음, 잡념, 부정적인 감정. 이런 것들을 통틀어 ‘업장’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저 하나의 명칭이자 정리 방식일 뿐입니다.
현재 제 관점과 방법은 맞서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내버려 두고, 어떻게 되든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요. ‘즐겁지 않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또 즐겁지 않아지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상태가 아무리 심하고 며칠씩 이어지더라도 결국에는 지나가지 않을까요? (심각한 부정적 상태가 몇 달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리적인 수준이니 의사의 진료가 필요합니다. 최근에 쓴 《일기를 써서 에너지가 높은 상태를 기록해 보기를 권한다》도 이 문제를 다룬 글입니다. 사람의 저점과 고점은 계속 변하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본연의 자신도 계속 스스로 회복해 갑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본래의 온전함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신감과 낙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른바 ‘수행’은 흔히 이런 부정적인 상태와 맞섭니다. 이미 낙담한 나를 더욱 낙담하게 만듭니다. 지금 저는 그것을 없애려고 생각하지 않는데, 오히려 조금 더 빨리 사라지는 듯합니다. 이런 ‘될 대로 되라는 태도’가 사실은 요즘 유행하는 ‘수용, 내맡김, 허용’이라는 말과도 맞아떨어집니다. 헬링거에게는 〈나는 허용한다〉라는 시가 있지요. 또한 일본 모리타 요법의 이념이기도 합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며, 고통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는 것입니다.
二、방법이 있을까?
운동을 하면 ‘잡념이 줄고 즐거움이 늘어납니다’. 그렇다면 운동은 ‘노력을 기울이는 방법’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고통이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운동은 그저 ‘잠시 늦추는’ 방법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흔히 즐거움과 고통이 ‘공존’합니다. 그렇다면 즐거움은 고통을 피하는 ‘일시적인 상태’일 뿐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고통이야말로 즐거움에서 벗어난 일시적인 상태, 즉 본연의 고요함과 즐거움에서 멀어진 일시적인 상태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너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운동할 기력과 용기 자체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저 ‘노력하지 않는 모습’일까요? 더더욱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모두 전체 체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라는 주제로 돌아왔네요. 업장이 사라지는 속도에 제가 개입할 수 있을까요? 평생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 나름의 속도에 맡겨두려 합니다.
三、인생의 다섯 요소라는 관점에서
이렇게 말하면 조금 추상적입니다. ‘실천’의 관점에서 말해보겠습니다. 인생의 다섯 요소인 학업, 일, 사회적 관계, 몸, 마음에 각각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반대로 진전이나 돌파구가 생기면 불안이 줄어듭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더 생긴 뒤로, 아직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가치투자를 깨우친 뒤로, 학업에 대한 자신감이 더 생긴 뒤로, 물론 수학과 물리는 여전히 약하지만, 또 관계를 가려 맺고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하고 각자의 과제를 분리하는 등의 변화를 겪은 뒤로, 체중을 15킬로그램 줄이고 테니스에 익숙해진 뒤로 불안이 많이 줄었고 상태도 훨씬 좋아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깥에서 답을 찾으라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깥에서 찾기를 멈추고 작은 자아가 녹아 사라진 뒤에야 경지가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섯 요소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삶의 상태를 정리할 때 나누어 살펴보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속도가 저의 ‘노력’ 때문일까요? 다른 사람이 제 사례를 참고하면 이 과정을 앞당길 수 있을까요? 제가 가치투자의 원리를 설명하고 가치투자 책을 추천하는 것이 정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 제가 안정적으로 투자하고 공개적으로 기록하며 30년 동안 꾸준히 높은 수익을 올리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버핏이 바로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설득했을까요?
그저 운이 그렇게 배치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 운이 그다지 좋은 편도 아닙니다. 학업과 일이 늘 순조롭고, 몸과 마음이 늘 건강하며, 사회적 관계에서 한 번도 해로운 패턴에 빠진 적 없는 사람들의 운이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