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은 장자 치유의 핵심이다—우리는 줄곧 연결을 찾고 있다
연결은 장자 치유의 핵심이다: 우리는 줄곧 연결을 찾아왔다
- 연결은 실존적 위기를 치유하는 답이며, 장자 치유의 핵심이다
연결감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절/소원함/소외/고독/버림받음/거절당하고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여기에 마르크스가 말한 객관적인 ‘소외’(인간이 노동 생산물, 노동 과정, 타인, 인간의 본질로부터 소외되는 것)가 더해지면 현대인에게 흔한 실존적 위기, 곧 고독, 불안, 막막함, 무의미함이 된다. 앞선 글 《대학생이 막막함을 느끼는 흔한 경우: 실존적 위기》, 《대학생의 기본 모순》에서 다룬 내용이다.
앞서 《나의 마르크스+장자+심리학 체계 개요》와 《고독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의 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방면의 연결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자신, 타인, 사회, 역사, 세계, 대자연, 우주와의 연결이다. 그중 자신과의 연결이 가장 중요하지만, 아마 가장 어려울 것이다.
연결이 없는 상태는 단절이고, 연결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처음부터 하나였음을, 자신과 타인, 역사, 세계, 자연이 처음부터 하나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연결되어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면 높은 주파수의 에너지가 생긴다. 불씨가 이어 전해지는 것과 같다. 마침내 본래의 온전함과 천인합일을 느낀다. 연결은 결핍 때문에 찾아 헤매며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자성이 충만하고, 연결이 충만하며, 아름답고 고요한 것이다.
대자연과의 연결은 가장 쉽지만, 그렇다고 그리 쉽지만은 않다. 앞선 글 《항저우 시후와 베이징 올림픽 삼림공원은 왜 작은 현성의 공원보다 나를 덜 치유할까》, 《대자연을 떠났다가 돌아오기까지, 나의 35년 여정을 돌아보다》에서 다뤘다.
타인과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 관계라는 과제는 매우 복잡하다. 앞선 글 《사회적 관계의 선별》은 서로 인정하고, 북돋우고, 존중하는 관계를 가려내는 일을 정리한 글이다.
사회 및 역사와 연결되려면 마르크스주의, 인민사관, 인민의 입장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에게 본래의 온전함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 《어떻게 민중의 소박한 진선미와 연결될 것인가》,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온전함을 느낄 수 있을까》에서 다뤘다. 그래야 자신의 소시민적 업장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선 글 《소시민적 괴로움》, 《소도시 출신 시험 수재의 병》도 참고할 수 있다.
심리상담은 의식으로 무의식과 연결하고, 치료자의 자성으로 내담자의 자성과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둔다. 심신 치유 분야는 몸과 감각에 연결되는 것을 출발점으로 강조한다. 심리학의 대상관계 학파와 실존주의 학파는 이미 이론적으로 관계와 연결을 중시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체계가 없기에 타인, 사회, 인간 본성의 선함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충분히 명확하지 않다. - 모든 사람의 몸부림과 탐색 뒤에 있는 자기 구원의 본능
윈난에서 상하이로 돌아오니 과거의 나, 모든 사람의 자기 구원 본능과 자기 구원의 시도가 더 또렷이 보였다.
앞서 《본래의 온전함, 어떤 독이 우리를 몰아 바깥에서 구하게 하는가》를 썼다. 지난 2년 동안 사람들의 업장이 깊어 우리를 잘못된 방식으로 바깥에서 구하도록 몰아간다고 자주 느꼈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바깥’에서 긍정적인 것도 구하고 있다.
상하이로 돌아와 2년여 전 다니던 스지공원, 아파트 단지 근처, 황푸강 변의 장소들을 다시 걸었다. 그곳에서 거듭 산책하고, 자전거를 타고, 생각하고, 책을 읽던 당시의 나와 연결되었다. 그때의 나도 사실은 줄곧 연결을 찾고 있었음을 보았다.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휴대전화와 라디오를 치켜들고 신호를 찾으며, 불을 피워 연기를 올리는 것처럼. 우리는 줄곧 주파수가 높고 에너지가 높은 채널을 찾고 있다. 우리 깊은 곳의 느낌과 지각은 줄곧 활발하게 작동하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호를 포착한다.
리비도는 줄곧 자신을 구하고 있다. 우리는 줄곧 본능에 따라 연결을 찾고 있다. 머릿속에 이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이론이 없더라도 말이다. 앞서 쓴 리비도 연재의 《나의 구조: 참된 내가 리비도와 함께하다》, 《내면아이가 나를 치유하다》에서 다뤘다.
그리고 사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에고(《수행자의 에고》)로 과거의 나를 깎아내리곤 하며, 과거의 자기 부정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연결을 찾고, 느끼고, 잠깐이나마 맺는 것 자체가 인간 자성의 본래의 온전함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우연히 고양이를 쓰다듬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자신의 다정하고 천진한 마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확고하게 ‘마르크스+장자+심리학’ 체계와 자성의 빛으로 방송국이자 등대가 되려 한다. 여러분도 높은 주파수의 신호를 찾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그 시절, 나는 무엇을 탐색하고 있었나
그 시절, 나는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그토록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았다. 나는 무엇을 탐색하고 있었고, 무엇을 찾아냈을까.
그 시절, 나는 영화와 TV 작품을 2900편 보았다. 나는 무엇을 탐색하고 있었고, 무엇을 찾아냈을까.
그 시절, 나는 합치면 몇 개월인지 몇 년인지 모를 시간을 웹페이지와 휴대전화를 넘기며 보냈다. 나는 무엇을 탐색하고 있었고, 무엇을 찾아냈을까.
그 시절,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무엇을 탐색하고 있었고, 무엇을 찾아냈을까.
그 시절, 나는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다녔다. 나는 무엇을 탐색하고 있었고, 무엇을 찾아냈을까.
그 시절, 나는 도시의 수많은 구석구석을 다녔다. 나는 무엇을 탐색하고 있었고, 무엇을 찾아냈을까.
탐색의 이면에는 결핍과 업장도 있고, 자성과 자기 구원도 있다. 리비도는 그 자체로 모순체다. 그러니 노력은 허구의 개념이다. 리비도는 줄곧 스스로 작동해 왔다. 길 위에서 줄곧 진화해 왔다.
탐색하는 길에서 수없이 울고, 수없이 웃고, 수없이 무릎을 쳤다. 수없이 괴로워하고 막막해하고 자책했다.
나는 책에서 나를 감동시키는, 에너지가 높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펑더화이 사령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민중, 장자, 소식 같은 이들이다. 인민사관을 갖고 나서야 제왕과 장수, 재상과 영웅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 하나하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명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길 위에서 나를 감동시키는, 에너지가 높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온갖 삶의 방식을 보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박한 민중, 소박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자신을 보고, 자신을 보살피고, 자신을 헤아리게 되었다. 중생을 보고 나서야 자신을 마주할 마음이 생겼고, 자신의 평범함과 한계, 어두운 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왕안석: 나는 만 권의 책을 읽고 천하의 이치를 두루 알았네. 지혜로운 이는 스스로 알겠지만, 어리석은 이가 누가 그대를 믿겠는가. 기이하구나, 한가한 도인은 세 구절 밖으로 뛰쳐나오는구나. 홀로 깨달음은 자신의 근본에서 비롯되며, 다른 곳에서 일어나지 않네.
탐색의 끝에 이르러 마침내 찾아낸 것은, 자성에는 본래의 온전함이 있어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만물을 가지런히 보니 함께 생겨나고,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된다.
처음부터 원만했으며, 지금 이 순간이 곧 피안이다. 마음이 곧 부처임을 볼 때에야 부처를 구한 것이다. 더는 피안을 찾지 않을 때에야 피안에 이른 것이다. - 자신과 연결되기는 어렵다
우리가 서둘러 먼 곳으로 가려 할 때, 그것은 흔히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처지, 지금 이 순간, 평범함, 고통에서만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을 싫어하고, 자신을 탓하고, 자신을 미워한다. 한 무리의 에고들이 다른 에고들에게 질려 버린 것이다.
학생이 학교를 벗어나 PC방으로 숨어들고, 직장인이 자리를 벗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휴대전화를 켤 때, 우리는 어떤 차원의 힘을 빌려 다른 차원에서 달아나고, 자신에게서도 달아난다.
앞서 《과거의 나에게 감사하고, 지금의 나에게 감사하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를 썼다. 지난 몇 년간 나의 성장과 실전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은 과거의 나와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나에게 감회를 담아 한마디 건넨다. 여기까지 탐색하느라 쉽지 않았지. 축하해, 찾았구나.
자신을 안아준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나는 이미 네가 상상하던 강한 모습이 되었어. 너를 데리러 왔어.
자신과 연결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지만, 좀처럼 자신을 위해 법정에 나가 증언하려 하지 않는다. 자꾸만 그날은 어둡고 정신이 흐릿해서 범인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수용에 관한 연재로 《업장 받아들이기》, 《평범함 받아들이기》, 《학력 열등감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등을 썼다.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날 나는 황푸강 변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황푸강과 억지로 연결을 맺으려 할 필요는 없어. 그런 과제는 없어. 앞선 글 《새로운 에고, 숙제하는 사람의 에고》에서 다룬 내용이다. 집에 가자. 자신과 연결을 맺자. 자신이야말로 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풍경이다. - 나의 제2의 고향, 윈난에 감사하며
아름다운 대자연, 쾌적한 기후, 낮은 생활비와 적은 물욕, 소박한 민중, 에너지가 높고 바르며 충만한 에너지의 장에 감사한다. 신선이 사는 복된 땅, 목말랐던 나는 이 오아시스를 찾았다. 나를 받아들이고, 내 몸을 머물게 해주었다. 이 마음이 편안한 곳이 나의 고향이다.
나의 새 삶을 이끌어주고 지켜봐 주었다. 난산 끝에 태어난 거대한 아기. 한때 나는 내가 세상에 버려진 아기라고 느꼈다. 이제 나는 우리가 모두 우주의 아이들임을 안다.
우주의 조화와 아름다움에 감사한다. 위대한 도는 이름 붙일 수 없고, 지극한 아름다움은 말이 없으며, 나 또한 처음부터 이 아름다움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