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와 소비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발췌, 4개 절, 2,0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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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쑤훠이(더우반)
출처: https://book.douban.com/review/16565375/
- 인간은 소외된 노동을 팔아 소외된, 비인간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욕구를 충족한다
사회주의를 전제로 할 때 새로운 생산 방식은 거대한 해방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적 역량을 새롭게 입증하고 인간의 본질을 새롭게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제 아래에서는 정반대다. 각자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를 새로운 의존 상태에 놓으며, 새로운 향유 방식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그렇게 해서 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요하려는 것이다. 각자는 타인을 지배하는 낯선 본질적 역량을 만들어 내어, 그 속에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할 길을 찾으려 한다. 따라서 대상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인간을 억압하는 낯선 본질의 왕국도 확장되며, 모든 새로운 생산물은 서로 속이고 서로 약탈하는 새로운 잠재력이 된다.
주관적 측면에서 생산물과 욕구의 범위가 끊임없이 확대되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지나치게 정교하며 부자연스럽고 상상으로 만들어 낸 욕망에 영리하게, 언제나 치밀하게 계산하며 봉사하는 노예가 된다. 마치 환관이 군주의 총애를 얻으려고 비열한 수단으로 군주의 마비된 향락 능력을 자극하려 애쓰는 것과 같다. 산업의 환관은 소비자의 가장 저속한 생각에 영합하고, 소비자와 그의 욕구 사이에서 뚜쟁이 노릇을 하며, 그의 병적인 욕망을 자극하고 그의 모든 약점을 엿본 뒤, 이 정성스러운 봉사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너는 네 모든 것을 팔 수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 유용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내가 국민경제학자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떨까. 내가 내 몸을 팔아 다른 사람의 음욕을 충족해 주고 그 대가로 돈을 얻을 때, 나는 경제 법칙을 따르는 것인가(프랑스 공장 노동자들이 자기 아내와 딸의 매춘을 추가 노동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또 내가 내 친구를 모로코인들에게 팔아넘길 때, 나는 국민경제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가(신병 매매 등의 형태로 직접 사람을 사고파는 현상은 모든 문명국에 존재한다)?
- 욕구의 정교화 VS 욕구의 짐승화와 극단적인 조악화
이러한 소외는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한쪽에서는 욕구와 그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이 정교해지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인간의 욕구가 짐승처럼 되고 극도로 조악해지며 추상화된다. 노동자에게는 신선한 공기와 빛에 대한 욕구가 사라졌고, 인간은 동굴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제 이 동굴은 문명이 내뿜는 지독한 독가스로 오염되어 있다. 게다가 집세를 내지 못하면 언제든 동굴에서 쫓겨날 수 있으므로, 그는 이 동굴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없다. 동굴은 마치 어느 날이라도 그의 곁을 떠날 수 있는 낯선 힘과 같다. 야만인이 동굴에서 느끼던 집의 안정감조차 노동자에게는 없다. 노동자는 이 시체 안치소에 집세를 내야 한다. 야만인과 동물에게도 사냥이나 운동 등의 욕구가 있고, 동류와 어울리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는 가장 질 나쁜 감자만 먹을 수 있다. 기계는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가장 조잡하고 야만적인 도구가 다시 등장한다. 로마 노예의 쳇바퀴가 수많은 영국 노동자의 생산 방식이자 생존 방식이 된 것이 그 예다. 기계는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어린이를 노동자로 만든다. 노동자를 돌봐 주는 이 없는 어린이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계는 인간의 나약함에 맞추어, 더 약한 사람들을 기계로 만든다.
상층의 욕구는 언제나 정교하고 은밀하며 모호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가상이다. 반면 하층의 욕구는 조잡하고 노골적이며 솔직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본질이다. 노동자의 조잡한 욕구는 부자의 까다로운 욕구보다 훨씬 더 큰 수입원이다. 과음은 조잡한 욕구의 표면적 충족이며, 야만 속에서 자신을 마취하는 것이자 문명적인 향유다. 따라서 영국의 술집은 사유제의 뚜렷한 상징이다.
속류 정치경제학은 노동자를 감각도 욕구도 없는 존재로 만들고, 그의 욕구와 생존 기준을 최저 수준으로 계산한다. 그것이 보기에 노동자의 모든 사치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부에 관한 학문이면서 동시에 절제와 궁핍과 절약에 관한 학문이다. 노동자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그 얼마 안 되는 것만 소유할 수 있으며,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 기본 교리는 자기 절제, 곧 삶과 인간의 모든 욕구에 대한 절제다. 네가 적게 먹고, 적게 마시고, 책을 적게 사고, 극장과 무도회와 음식점에 덜 가고, 적게 생각하고, 적게 사랑하고, 이론을 적게 논하고, 노래를 적게 부르고, 그림을 적게 그리고, 펜싱 등을 적게 할수록 너는 더 많이 저축할 수 있다. 그러면 좀먹지도 않고 도둑맞지도 않는 네 보물, 곧 네 자본은 더욱 커진다. 네 존재가 보잘것없어질수록, 네 삶을 덜 표현할수록, 네 재산은 더 많아지고, 외화된 네 삶은 더 커지며, 소외된 네 본질도 더 많이 축적된다.
국민경제학의 원칙인 욕구의 절제는 그 인구론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마저 더없이 사치스럽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산은 공공의 불행으로 나타난다.
- 금리생활 자본가, 산업자본가와 소비, 사치
사치와 낭비. 첫 번째 측면은 소외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질에서 멀어진 채, 그저 일시적이고 제멋대로 방종하는 개인으로 존재한다. 두 번째 측면은 소외에 대한 동조와 숭배다. 타인의 노예노동과 피땀을 자신의 탐욕이 얻어 낸 전리품으로 여기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 자체를 아무 가치도 없는 희생물로 여긴다. 인간을 경멸하고, 수백 명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을 제멋대로 낭비한다. 그는 인간의 본질적 역량이 실현되는 것을 그저 자신의 방종한 욕망과 기이한 취향, 엉뚱한 생각이 실현되는 것으로만 여긴다. 세 번째 측면은 소외의 부정이다. 낭비를 통해 마치 자본의 주인이 된 듯 행세하며, 자신이 자본의 노예라는 사실을 회피한다.
화폐 이자의 하락은 산업 운동의 필연적 결과다. 낭비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감소와 소멸로 나아가며, 전체 생산 체계에서 도태된다. 화폐 이자의 하락을 프루동은 자본의 지양과 자본의 사회화 경향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노동하는 자본이 낭비하는 부에 거둔 완전한 승리, 즉 모든 사유재산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상징한다고 해야 한다. 금리생활자 계급은 노동하는 산업자본가나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유재산이 노동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정치경제학은 지주가 유일하게 전혀 생산하지 않는 금리생활자임을 이미 입증했다.
산업자본가도 향유하지만, 그 규모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생산과 자본의 재생산에 결코 영향을 주지 않게 한다. 향유는 자본에 종속되고, 향유하는 개인은 자본화된 개인에 종속된다.
- 화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소외는 나의 생활 수단이 타인에게 속하고, 내가 바라는 것이 내가 얻을 수 없는 타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자본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활동은 자기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되며, 하나의 비인간적인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속류 정치경제학자는 네게서 빼앗아 간 삶과 인간성의 그 부분을 모두 화폐와 부로 보상해 준다. 네가 스스로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네 화폐는 할 수 있다. 화폐는 먹고 마실 수 있고, 무도회와 극장에 갈 수 있으며, 예술과 학식, 역사적 보물과 정치권력을 얻을 수 있고, 여행할 수 있다. 화폐는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고, 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화폐야말로 진정한 능력이다. 그러나 화폐는 이 모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만들어 내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려 하지 않는다. 나머지 모든 것은 그저 화폐의 하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열정과 모든 활동은 필연적으로 부자가 되려는 욕망 속에 묻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