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자기와 심리학 시리즈

내면의 아이가 나를 치유한다

“내면아이”가 나를 치유한다

一、“나”는 내 안의 아이와 함께한다

심리학을 이야기할 때 흔히 “자신의 내면아이를 치유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 사상 체계에 비추어 이해하면, 많은 경우에는 자신의 내면아이 곁에 머물며 그 아이가 자연스럽게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본래적 자아의 평온함, 본래의 온전함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치유. 앞선 글 《세상 사람은 모두 괴롭다 — 누리꾼의 질문에 답하며: 왜 운명은 유독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가》). 또 많은 경우에는 내면아이가 “나”를 치유하고 있다.

“나”란 무엇인가는 “나”의 구조와 관련된다(앞선 글 《여러 학파가 말하는 ‘자아’의 구조 — 프로이트, 호나이, 선종, 도가, 마르크스 등》). 일상에서 “나”라는 말을 쓸 때 가리키는 것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나, 곧 호나이가 말한 “현실적 자아”다. 여기에는 표층의 언어적 사고, 감정적 자아, 작은 자아의 업장, 직관적 자아, 거짓 자기 등이 포함된다. 즉 표층과 중간층의 나다.

내면아이는 더 깊은 층위의 나이며, 두 측면으로 나뉜다. a. 트라우마, 방어, 감정 등의 업장, b. 본래의 온전함을 지닌 본래적 자아. 이 둘은 종합적으로 하나의 “마음의 힘”으로 드러나며, 나름의 방향과 추동력을 지닌다. “나”는 이 마음의 힘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자신이 왜 침체하고, 회피하고, 미루는지,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방향과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마음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다. 현실적 자아와 마음의 힘이 자주 엇갈리기 때문이다. 코끼리와 코끼리를 탄 사람처럼. 눈먼 사람이 눈먼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낭떠러지 앞에 다다르는 셈이다.

앞선 글 《마음의 힘/리비도가 운명을 결정한다》에서도 말했듯, 나는 내 마음의 힘, 무의식, 내면의 정신을 부르는 이름으로 “리비도”를 좋아한다. 신비롭고, 규정하기 어려우며, 생기 넘치고 자유로우면서도 사납고 종잡을 수 없고, 때로는 적극적이었다가 때로는 침체하며, 때로는 조금 맛보는 데 그쳤다가 때로는 바다처럼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면아이”라는 말은 참으로 생생한 표현이다.

二、많은 경우 내면아이는 나를 치유하고 있지만, “나”는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여러 방어가 그렇다. 일부 반항적 행동은 사실 오히려 내면의 방어기제가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는 것이다. 분노가 그렇고, 해리도 그렇다. 방어기제는 모두 자신을 지키는 좋은 것이다. 다만 지뢰를 남기므로, 평화로운 시기에 지뢰를 제거해야 한다.

또 다른 상황도 있다. 마음의 힘/리비도/내면아이는 무척 억울하다. 분명 자아실현을 하고 있고, 열심히 노력해 진선미를, 심지어 놀라운 성취까지 이루었는데도 “나”는 도무지 만족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처럼 말이다. a. 마음을 써서 무척 흐뭇한 행동을 했다. 예를 들어 어느새 식사와 운동에 모두 신경을 써서 “나”를 많이 날씬하게 해주었고, “나”는 여기저기서 으스댈 수 있게 되었다. b. 또는 조용히 마음 따뜻해지는 일을 했다. 예를 들어 “나”는 그 아이가 짧은 영상을 본다고 원망하지만, 그 아이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소박한 영상을 많이 보며 묵묵히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겼다. 그런데 나는 그저 격노하기만 한다. c. 그 아이는 PC방에 가는 데 빠져 있지만, PC방에서 아주 좋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본다. 그런데 “나”는 낙담하고 격노한다. d. 또는 그림이나 수학 등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부모가 너무 낙담하고 지쳐 있어서 그 사실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나는 정성을 들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에너지와 공명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장자, 심리학, 투자, 나아가 수학과 컴퓨터에 관해서도 좋은 글을 많이 썼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컴퓨터학과 출신으로 작은 도시에서 문제 풀이에 매달리던 모범생과 베이징에서 타향살이하며 일하는 노동자의 사고방식에 자신을 동일시했고, 최상위 고소득 개발자들을 부러워하며 자신을 깎아내렸기 때문이다. 정작 자신의 현실, 경험, 마음의 힘, 마음이 걸어온 여정은 직시하지 않았다. 현실적 자아가 너무 심하게 대상화되고, 물화되고, 소외되고, 규율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三、내면아이는 나의 형제다

요즘 나는 많은 순간, 내 안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 곁을 지키는 듯하다. 그 아이의 논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가 완쾌하기를 기대하지도 않으며, 어떤 외적인 성취를 이루기를 기대하지도, 이른바 “진척”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곁에 머물며, 그 아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조용히 함께한다. 나에게는 그 아이를 비판하거나 평가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나”는 더 이상 엄격한 부모나 초자아가 아니라 그 아이의 형제다. 우리는 모두 우주의 아이이며, 우주의 에너지다.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인다. “우리” 모두가 평온한 나날을 보내며 본래적 자아의 고요함을 느낄 때, 그곳이 이미 피안이다. 나는 그 아이와 하나임을 느낀다. 그러면 나의 자아는 더 이상 분열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가 되며, 천인합일을 이룬다. 나와 그 아이가, 곧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나”가 모두 완벽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말이다.

“나”, 특히 표층의 언어적 사고는 나의 전부가 아니며, 특히 근본인 본래적 자아 자체는 아니다. 표층의 나와 깊은 층위의 정신이 깊이 연결되어야만 “나”는 온전한 내가 되어, 우주가 내게 부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앞선 글 《장자의 제물론과 마르크스: 표층의 언어적 사고에서 심층의 정신으로》).

“자신의 내면아이를 치유한다”는 말을 때로는 이성으로 내면아이를 관리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얕게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그 말에는 내면아이를 부정하는 뜻이 담기기도 하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은 인식이다.

덧붙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나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아이를 둔 가정을 존중하지 않으려는 뜻은 없습니다.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즉시 삭제하거나 수정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행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