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감 강박
실존주의와 정신분석으로 본 우월감
一、우월감은 명백히 홀로 높은 곳에 자신을 고립시키고 자기애를 과장하는 방어 상태다
타인을 대상화하고 폄하하는 것은 투사와 악순환을 이룬다. 상대를 낮게 볼수록 더 사물화하고 더 많이 투사하며, 더 많이 투사할수록 상대를 더 낮게 본다.
투사의 근원 중 하나는 심리적 경계가 모호하다는 데 있다. 우월감은 겉으로는 회피이자 ‘경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전히 경계가 모호한 상태다. 이는 바로 작은 자아가 다른 작은 자아 및 이드와 관계 맺는 방식이며, 광범위한 인격 분열과 해리에 속한다. 자신의 본성 및 이드와의 연결이 끊어진 채, 나는 우월해야만 존재할 자격이 있고 평범한 사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느낀다.
이런 의도적인 ‘회피’는 오히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타자의 힘과 척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까마위를 하찮게 여긴다면서, 반드시 까마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하며 비싼 장비를 잔뜩 사서 새를 관찰하고 감시하며 거리를 측정한다고 해 보자. 이는 명백히 가까운 거리에서 얽혀 있는 상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주인은 노예보다 이 관계에 더 의존한다.
예를 들어 소시민적 엘리트주의는 늘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들이 분발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정말로 우월하다면 어째서 남들이 분발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겠는가? 보통 사람은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보며 분발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 않는다. 이는 명백히 자기 공격을 바깥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二、우월감과 대타자 크툴루
우월감이 어린 시절에 뿌리내리는 원인 중 하나는 ‘조건부 사랑’이다. 아이는 마땅히 받아야 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두려움, 허무, 해리, CPTSD, 즉 초기의 실존적 고통 속에서 길을 더듬다가, 마침내 어느 날 ‘조건부 사랑’을 찾아낸다. 자신이 어떤 ‘조건’, 특히 ‘성적’을 충족해야만 ‘관심’과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그것이 단지 ‘부모’의 인정만이 아니라, ‘부모’가 의존하고 두려워하는 대타자 크툴루에게서 오는 인정이라고 느낀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 답안지를 요구하는 까닭이 허공 속 어떤 ‘존재’에게 답안지를 제출하기 위해서임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월감이란 대타자 크툴루와 계약을 맺어 대타자의 ‘인정’을 얻는 것이다.
三、우월감과 자본
우월감을 위해 비교하는 것은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비교할 수 있는 것, 서로 다른 것, 곧 사람들 사이의 차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본래의 온전함이 아니므로, 필연적으로 인간 중심이 아니라 사물 중심, 자본 중심, 이질적인 것 중심이다.
그중 일부는 지식 자본, 인식, ‘경지’를 포함하는 자본이고, 또 하나는 업장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우며 더 높은 수준에 있다고 여기면서 어떤 외부의 것(‘경지’를 포함한다)에 의존하고,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암컷 경쟁과 수컷 경쟁은 소외, 남과의 비교, 우월감의 집대성이다.
사유제 아래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확대하고 악성 경쟁과 과열 경쟁의 토너먼트를 벌이며, 이를 기준으로 높고 낮음을 정한다. 진정한 공유제 아래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이것이 소규모·영세 자본가들이 흔히 쇼비니즘에 의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쇼비니즘은 그들에게 값싼 우월감과 존재감을 준다.
四、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과 우월감
이른바 수행자, 마르크스주의 애호가, 고고한 사람들에게는 흔히 우월감이라는 업장이 있다. 혹은 바로 그 우월감이라는 업장이 그들을 수행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기도 한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애호가는 자신만 홀로 깨어 있다고 여기며 선전과 계몽에 나서고, 남들이 분발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많은 장자 애호가는 자신만 홀로 맑다고 여기며 세상 사람들을 모두 속되게 보고, 의기소침해져 세상을 피한다. 철인왕 콤플렉스다.
《소시민적 괴로움》: 우월감으로 허무와 존재감의 결핍에 맞서지만, 그 본질은 다른 사람들을 사물화하여 NPC로 취급하는 것이다. 우월감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자비와 공감이 없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의 본래의 온전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본래의 온전함을 보고 용암도 보는 것이다(업장 VS 본성의 변증법).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는 필연적으로 장자에게로 나아가고, 장자 학파는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간다. 우월감이라는 과제를 해결한 마르크스주의 애호가와 장자 애호가만이 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으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