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청년의 우울, 조증, 자포자기—정신의 리비도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도 한다
심층 정신/심력/리비도는 모든 것을 알고, 진실을 알고, 모든 것을 생각하고 추론해 보았으며, 확률이 높은 결말을 예감할 수 있다.
이것은 청정무위의 이유 중 하나다. 뇌는 더 이상 스스로 번뇌를 찾아 쓸데없는 생각에 빠질 필요가 없다. 청정무위의 반대는 소란을 피우며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 리비도는 알지만, 현실의 나와 뇌, 소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리비도는 정신이 죽어 가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우울해지고 조증 상태에 빠진다.
예를 들어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2학년의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많은 학생은 자신이 곧 사회에 발을 들일 것이며, 아마 평생 정신적으로 죽은 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학생들의 진로가 갈라지면서 인생도 갈라진다. 그전에는, 어릴 때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줄곧 대다수 학생이 얌전히, 바른 자세로 수업을 듣는다. 중학교 1학년부터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자신을 포기하기 시작하고, 중학교 2학년부터는 불량배처럼 구는 아이들이 늘고 반항적인 행동도 늘어난다. 오랜 학습된 무기력,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상황. 리비도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처가살이를 하는 데릴사위로 들어갈 예정인 몇몇 사람도(실리적인 목적으로 결혼하는 경우) 마찬가지로 괴팍하게 행동한다. 정신적 생명이 큰 타격을 입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사회에 나간 지 몇 년이 지나면 나무토막처럼 무감각하고 굼떠진다.
리비도는 미리 자신을 추모한다. 소란을 피우고, 이목을 끌고, 자포자기하고, 공격성을 드러내며, 자기를 파괴하고 파멸을 갈망한다. 리비도는 자신이 더 이상 사람답게 살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몸부림친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깊이 있는 지점이다.
이것은 도가 철학의 깊이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도할 수 있는 몫은 1할이고, 어쩔 수 없는 몫은 9할이다. 이른바 재능과 노력은 운명 앞에서(특히 25세 이전에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주어진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흐름에 순응하며 청정무위해야만, 자신에게 있는 그 1할의 주도성을 진정으로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은 인본주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의 심층 정신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 한 명 한 명의 이면에는 깊은 철학적 과제와 정신적 여정이 있다. 겉으로 악해 보이는 어떤 행동들의 이면에는 오히려 인간적인 욕구가 있다. 평범한 삶 속에서 분투하는 모든 보통 사람을 존중한다. (《정신분석은 평범한 삶 속의 시정, 신성함, 크툴루를 보게 한다》, 《보통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온전함을 느낄 수 있는가》)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자포자기해서 앞날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앞날이 없다는 것을 보고 자포자기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 곳곳의 많은 젊은이가 보이는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행동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영국의 유명한 사회학·교육학 저서 《노동하기를 배우기》는 하층 계급의 아이들이 자신은 ‘공부할 재목’이 아니거나, 달리 말하면 ‘공부할 팔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주도적으로 ‘거리의 지혜’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제1차 세계대전은 어쩌면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가난한 슬라브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 삶이 고통스럽고 희망 없는 젊은이들의 집단 자살 행위였을지도 모른다(영국·프랑스·독일 병사들의 참호 돌격). 이것은 세계 정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은 데 대한 또 하나의 잔혹한 설명이다. 히틀러와 나치를 길러 낸 것 역시 이러한 환경이었다.
덧붙임: 《마르크스+장자+심리학 사상 체계 개요》
덧붙여, 여기서는 죽음의 철학도 함께 이야기한다.
죽음 불안은 죽음과 관계가 없고 다른 과제라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어렴풋한 느낌이다.)
육체적 죽음의 과제, 정신적 죽음의 과제, 중년의 죽음 불안이라는 과제는 서로 다른 과제다.
리비도는 진실을 안다.
- 리비도가 자신의 육체가 정말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면(말기 암), 오히려 많은 사람이 평온해지고 깨달음을 얻는다(어빈 얄롬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 리비도가 정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우울해지고 조증 상태에 빠진다(이 글).
- 중년의 죽음 불안은 그 일부가 오히려 리비도의 긍정적인 표현인 경우가 많다. 리비도가 이제 막 이 게임의 재미있는 면을 경험하고 고무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암시(심력의 과도한 소진, 외부의 간섭, 경계 침범)는 자기애를 몹시 불쾌하게 한다. 받아들이기 싫고, 무도회가 끝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불안이다(긍정적이고 정상적인 감정). 물론 이것은 그중 일부일 뿐이다. 내 당시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 불안이라는 과제에서 ‘죽음’이라는 말은 하나의 철학적 추상이자 느낌일 뿐이다. 예를 들어 결혼을 재촉받고 강요받는 등 여러 압박 속에서 ‘죽을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리비도가 자신이 정말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과는 별개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