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장자 시리즈

현재를 살아가기의 수준은 인생의 핵심 척도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할 일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며, 그것이 발을 딛는 곳은 현재를 살아가기에 있다. 앞선 글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

一、한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는 수준

이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수준과 같다. 그 사람의 정신적 성숙도이자 마음의 수준이며, 이론과 실천의 수준, 실사구시의 수준이다(심리학에서 말하는 현실 검증 능력, 통합 수준, 행동 수준). 한 사람의 주체성 수준, 인간 중심성의 수준, 소외에 저항하는 수준이며, 소박함과 본능, 상식을 얼마나 잃었는지를 보여 주는 수준이다. 한 사람의 자성 대 업장이라는 핵심 변증법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 곧 업장을 소화하고 자성이 밝아지며 자기가 성장하는 수준이다. 이는 평온함과 연결의 수준을 결정한다. 이른바 깨달음은 마음이 성장하는 과정의 한 단계이자 전환점이다.

앞선 글 《사람의 수준 구분》《깨달음의 단계》《소박함을 잃다》

二、구체적인 모습

  1. 외부 세계(세계, 사회, 역사, 인민, 대자연, 계급, 학업, 일, 업계 등)의 실상 전체를 알아차리고 그와 연결된다(전지전능하다는 뜻도, 편협한 망념에 사로잡혀 빠져든다는 뜻도 아니라, 변증법적이고 종합적이며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는 뜻이다).
  2. 자신의 실상 전체를 알아차리고 그와 연결된다(자성 대 업장의 핵심 변증법, 자기, 작은 자아, 리비도, 자신감에서 자부심으로 나아가면서도 무능함을 받아들이고 평범함을 끌어안는 것 등이며, 열등감-자만-자기혐오가 아니다).
  3. 마음의 힘과 연결되고, 효과적인 메타 행동과 메타 인지를 하며, 실사구시한다.
  4. 일과 휴식을 조화시키고, 쉬고, 멈추고, 고요해지고, 그친다.
  5. 지금 이 순간 행복하고 평온하며, 조건 없이 좋고, 지금 이 순간 온전하다. 즉 장자의 철학처럼 본래의 온전함, 천인합일과 연결되는 수준이다.

몰입이 반드시 높은 수준의 마음챙김인 것은 아니다

몰입은 사실 어렵지 않다. 평범한 중학생이 문제를 풀거나, 테트리스를 하거나, 테니스를 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고 춤을 추거나, 프로그래머가 코드를 짤 때도 몰입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평생 이런 몰입을 추구하는 데 빠져 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마음챙김을 실천하는 삶은 아니다.

진정으로 높은 수준의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무심으로 도에 합치하고, 진정으로 운명과 역사적 사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 고흐에게는 일반적인 마음챙김과 높은 수준의 마음챙김, 높은 수준의 알아차림이 있었고, 내적 소모와 잡념, 정신적 증상도 있었다.

기타

《낮은 상태로 살아가기》에서 다루는, 역경과 곤경 속에서 살아가는 수준 역시 현재를 살아가는 수준의 일부다. 현실, 지금 이 순간, 마음의 힘, 자기 자신과 연결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이 곧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앞선 글 《낮은 상태로 살아가기 2: 내면에서 찾기의 종결》

한 사람이 쉬는 수준은 현재를 살아가는 수준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다. 《휴식에는 큰 지혜와 큰 용기, 큰 정신 집중력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절망을 허용하기》: 절망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잔혹한 불허다. 자신에게 절망을 허용하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사람만이 실상 속에서 살아가며 운명에 순응할 수 있고, 절망적인 곤경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반 고흐의 정신은 줄곧 절망하면서도 줄곧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三、인생의 다섯 요소인 학업, 일, 사교, 몸, 마음은 근본적으로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정도에 달려 있다

  1. 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는 타인과 세계를 사랑하는 정도다

어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보답받지 못하고, 사람이 착하면 남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말로 반박할 것이다. 명확한 경계도, 자신을 보호하고 자립하는 힘도 없이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거나,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유형의 착한 사람은 진정으로 소박한 진선미를 갖춘 사람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타인과의 연결이 없으며, 본질적으로 타인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며 추상화하고 도구화한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자비로운 수준은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는 수준의 상한선이다.

한 사람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하는 정도는 타인을 사람으로 대하는 정도와 같다.

  1. 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가 타인과 사회가 그를 사랑하는 정도를 결정한다

(다만 아이는 이 점에서 예외다. 부모를 향한 아이의 사랑은 100%다. 그래서 아이는 천사이며, 부모는 아이에게 은혜를 입는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독하고 착취적인 부모는 아이의 피를 빨고 소진시켜, 아이가 자신을 ‘사랑’하는 수준을 떨어뜨린다.)

아이는 본래 경계가 없고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면서도, 부모를 향한 사랑은 100%다. 반면 많은 부모는 소외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아이의 경계 부재를 이용해 심리적으로 조종하고 피를 빤다. 이것이 사유제 사회에서 인간 가족의 변증법이다. 그렇기에 소박하고 사랑이 있는 가정에서 자라는 것만으로 출발선에서 앞서게 된다. 현대 심리상담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젊은이들이 경계를 세우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1. 사교 관계의 선별

사교는 지금 이 순간에 있고, 우정은 지금 이 순간에 있으며, 사랑도 지금 이 순간에 있다(양쪽이 각자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는 수준의 일부다.

반례로, 소규모·영세 부르주아의 무효한 사교, 상위 계층을 향한 사교, 유독한 사교, 업장으로 얽힌 관계는 현재를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1. 학업과 일, 가치투자와 창업에서도 현재를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과 현재를 살아가지 않는 것의 무서움을 알 수 있다. 몸은 더욱 분명하다.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면 몸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다.

四、변증법적 유물론과 노력에 대한 반대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마음을 바꾸고 원하는 것을 현실로 구현하기가 아주 쉽다는 식의 유심론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는 정도 역시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결정된다. 앞서 언급한 아이의 소외 과정과도 같다.

《수행은 사이비 개념이다》《노력은 사이비 개념이다》

자신이 ‘현재를 충분히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 역시 하나의 허용이며, 더 깊은 차원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기’에 집착하는 것 역시 하나의 집착이며, 현재를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불교의 중관, 공공 등의 개념은 모두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 쓰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멈추고, 고요해지고, 그치고, 덜어낸다. 좌망하고, 도를 추구하며 날마다 덜어내면, 텅 빈 방에 밝음이 깃든다.

현재를 살아가지 않는 정도를 줄이면, 남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결이자 현재를 살아가기다. 일기를 쓰고 산책하는 것도 모두 그러하다.

사람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자신이 자기 마음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결정할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 내면과 외부, 현재와 역사가 함께 결정한다.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역사적 과정이다. 수행을 통해 속도를 높여 전지전능해질 수는 없음을 깨닫는 것, 자기 내면에는 치유하고 밝아지며 위로 향하는 유물론적이고 객관적인 자성이 있음을 깨닫고, 자성을 알아보고 자성에 맡기는 것, 노력 강박과 수행 강박이 잘못된 인식이며 진정한 행동성과 실천성이 아님을 깨닫는 것, 자유와 능동성이 집착 및 힘을 주어 애쓰는 것과 모순되며, 집착하고 힘을 주어 애쓰는 것은 업장이자 잘못된 인식이고 부자유와 반능동성의 표현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정신적 성숙도와 현재를 살아가는 수준의 표현이다.

현재를 살아가기와 계급

지구상의 70억 명 중 수억 명, 십수억 명이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며, 여기에는 뚜렷한 계급적 법칙이 있다. 이는 분명 통계학과 유물론의 문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다른 계급보다 현재를 더 잘 살아간다. 노동, 고통, 생활, 사랑, 친구가 모두 지금 이 순간에 있으며, 이는 그들에게 애초에 ‘미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소규모·영세 부르주아에게는 실존적 위기가 있고, 다른 계급의 소외는 더 깊다. 소규모·영세 부르주아는 자본을 중심으로 삶을 구성하며, 대타자 크툴루가 묵인하는 환상 속에서, 백일몽과 시와 먼 곳을 꿈꾸며 살아간다. 내가 왜 소규모·영세 부르주아 비판에 중점을 두는가 하면, 소규모·영세 부르주아가 무지와 소외를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우리 일상생활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소규모·영세 부르주아이며,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도 마찬가지다. 지식인인 이상, 소규모·영세 부르주아인 이상, 소규모·영세 부르주아인 것이다.

볼셰비키의 요체는 선진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후진성에 대한 저항이다

즉 소규모·영세 부르주아 지식인 가운데 좌익 전위대가 간신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이미 대중의 뒤로 처졌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왜 자주 선진성에서 퇴화하고 쇠락하며 부패하는지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이는 혁명의 테르미도르 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와 장자의 사상 체계에 기반한 심리학적 설명이다.

올바른 인식은 올바른 입장에서 나온다. 10월 혁명의 경험을 정리해 보면, 병사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각이 있다면 무력이라는 고도로 소외된 자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인민을 위해 쓰이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각국이 총동원에 나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대규모로 병사를 징집하고, 전통적인 융커식 농민 징집에서 벗어난 것이 볼셰비키화가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 이유다.

마찬가지로 지식인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각이 있다면, 지식이라는 소외된 자본 역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해 쓰이게 된다.

20세기 초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의 혁명에서 노동자·농민·병사·학생 네 집단이 연합한 것은 역사의 특수한 시기에 주어진 기회였으며, 기계적으로 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파리 코뮌처럼 기나긴 역사의 암흑 속에서 번개처럼 짧게 지나갔더라도, 빛을 드러냈다.

부록: 이 글의 역할

이 글은 《현재를 살아가기》 연작의 연장이자, 더 명확한 체계의 틀이다.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의미를 논증하는 데, 어떻게 현재를 살아갈 것인지, 어떻게 극도로 낮은 상태에서 살아갈 것인지,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중점을 둔다. 《낮은 상태로 살아가기》는 낮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극도로 낮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지적한다. 작은 자아가 되살아나 높은 상태를 향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글 《현재를 살아가는 수준》은 마음에 관한 학문과 심리학을 연결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수준을 핵심 척도로 삼아 《사람의 수준 구분》《사교 관계의 선별》《깨달음의 단계》에 적용한다. 또한 ‘현재를 살아가기’를 ‘실천’과 행동의 핵심 요소로 삼아, 그것이 구체적인 실천과 인생의 다섯 요소에서 어떻게 실천적으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도가 철학이 하나로 통합되는 지점이기도 하며, 레닌주의 전위대 이론에 대한 기초적인 해석이기도 하다. 흔히 전위대 이론을 엘리트주의적 계몽론이나 주입론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한 재차 비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다. 마음의 철학을 깊이 이해할수록 이 말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고의 철학자가 지니는 의미다. 《심리학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지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