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이용자 K와의 대화: 문제풀이 모범생의 수행 강박과 엘리트주의, 그리고 모든 이의 본래의 온전함
유료 이용자 K와의 대화: 시험형 인재의 수행 강박과 엘리트주의 VS 누구에게나 있는 본래의 온전함
주: a. 이 글은 K 본인이 검토했으며 외부 공개에 동의했습니다. b. 일부 대화는 정식 상담 외에 추가로 나눈 내용이라 다소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갑니다.
쑤훠이:
고학력 지식인들이 ‘수행’을 이야기할 때 흔히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답을 구합니다. 바깥에서 구하는 것을 멈추고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음을 보는 것이지요.
a. 먼 곳에 대한 환상, 즉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에 대한 환상, 예술·철학·전원생활·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기·은퇴 등에 대한 환상, 창업에 대한 환상.
b. 지적 능력 숭배, 엘리트주의, 전능한 자기애.
어떤 ‘고급’ 철학을 향한 갈망, 노자·왕양명·딩위안잉에 대한 집착, 그 뒤에 있는 전능한 자기애의 환상.
수행에 대한 집념, 수행을 일종의 기량으로 여겨 점점 더 강해지고 장삼봉 같은 경지로 나아가려는 생각입니다. 이른바 수행자라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문제이지요.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입니다. 심지어 ‘굽은 길에서 추월하겠다’는 식의 기회주의적 사고도 있습니다.
명상을 습득할 수 있는 기술, 마나를 빠르게 회복시켜 주는 작은 파란 물약으로 여깁니다. 명상은 전략이어야 합니다. 명상의 요체는 마음챙김, 알아차림, 연결 그 자체입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아인슈타인은 일부러 명상하지 않았습니다.
c. 오만한 마음, 분별하는 마음.
자연과 연결되어 꽃과 풀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 오히려 오만함과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을 비롯한 소수만이 이런 고요함을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적 감수성, 미적 감각, 경지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사람을 구분하는 마음, 오만함, 우월감의 업장이 너무 깊어 다른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외로움이라는 과제가 더 무거워집니다.
반대로 어린아이와 평범한 사람들을 보며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동등하게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고, 누구나 동등한 깊은 지혜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회 밑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거나 뛰어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고통과 시련이 더 많은 것이며, 운명의 문제입니다.
장자 역시 엘리트주의에 반대합니다. 지혜와 성스러움을 버리라고 하지요. 『장자』에는 장인, 포정, 농민, 장애인이 많이 등장하며, 그들이 본래부터 온전하고 도에 들어서는 모습을 그립니다. 반면 안회와 공자는 지식인 대조군으로 등장합니다.
쑤훠이:
상담에서도, 친구나 부부 사이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연결에서 진정으로 작용하는 것은 지혜나 학식, 가르침이 아닙니다. 인간 존중, 수용, 알아차림, 진선미 등 누구에게나 있는 깊은 자성의 빛입니다. 두 사람의 자성의 빛이 연결되면 각자의 업장을 비켜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연결이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친구 K:
전적으로 동의해.
그러니까 네 말은 모든 사람에게 자성의 빛과 본래의 온전함이 있는데, 어떤 업장들이 그 빛이 발휘되는 걸 막고 있다는 거지? 나쁜 사람들, 우리가 싫어하고 피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본래의 온전함을 지니고 있지만 업장에 가려져 있다는 거지?
쑤훠이:
맞아. 이른바 나쁜 사람들, 우리가 피하는 사람들은 업장이 너무 깊은 것이고, 그건 모두 후천적인 거야. 선천성과 후천성에 대한 논의도 관련되니, 철학적 사유의 바탕에는 역시 인격의 힘과 밝음이 있어야 해.
그런 이른바 나쁜 사람들도 나쁜 정도가 제각각이고, 양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모두가 나쁜 짓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끼리 영혼이 공명한다는 것도 아니지. 나쁜 사람도 좋은 서비스와 좋은 사람을 좋아해. 다른 나쁜 사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기도 해. 그 뒤에서는 여전히 자성이 작용하고 있는 거야. 나쁜 사람일수록 사회와 생태계에 더 의존해.
인간의 본성은 선하며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는 것은 사회과학의 핵심 공리 중 하나야. 사회과학의 여러 체계는 기본 전제가 서로 달라.
나는 요즘 사람을 알아갈 때 상대에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하는지, 악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물어봐. 근본적인 이해와 관련된 문제니까.
많은 원가족은 업장이 너무 깊고, 양쪽의 업장과 과제가 너무 깊이 얽혀 있어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비교적 좋은 방법이야. ‘국 한 그릇이 식지 않을 거리’라는 말을 들어봤을 텐데, 어떤 경우에는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해. 민간에서는 서로 ‘상극’이라고 하지.
친구 K:
응, 나도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굳게 믿어. 불교에서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
쑤훠이:
정말 기쁘네. 네가 정말 이 지점을 정확히 짚을 수 있다면, 그게 선종에서 말하는 자성을 보는 것이야. 자성은 처음부터, 언제나 밝았어. 전에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 개념 발전 약사」를 올렸지.
너도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알잖아.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지만 외부에 의해 소외된다는 거야. 이것은 역사적 유물론이기도 해. 인간은 역사와 환경,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지. 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인간이 기계적인 존재만은 아니며 한 줄기 자유가 있다고 봐. 도가도 인간에게 한 줄기 자유와 아홉 몫의 어쩔 수 없음이 있다고 이야기해.
쑤훠이:
네가 추구하는 ‘모든 체계를 비교한 뒤 가장 훌륭하고 모든 것을 통합하는 사회과학 체계를 찾아내는 것’은 먼 길이고, 그 안에는 업장과 집념이 있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그런 체계가 없고, 대가들 대부분에게도 없어.
나는 마침 나 자신에게 그런 체계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바로 마르크스와 장자의 사상 체계야. 나도 그런 탐색 과정을 거쳤어. 다만 전능함을 꿈꾸는 집념만으로 한 것은 아니고, 한 걸음씩 연결되는 느낌을 따라간 거야. 「나의 ‘마르크스+장자+심리학’ 체계 개요」에 썼지.
나는 한편으로 네게 이 체계를 소개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해탈의 길은 여기에 집착하는 데 있지 않다고도 말하는 거야.
팡둥라이의 경영자 위둥라이나 장구이메이 선생님도 사회과학 체계와 사상이 반드시 정합적이지는 않을 거야. 살아가는 데 충분하고, 충분히 즐겁고, 충분히 평온하고 행복하면 되는 거지.
‘모든 체계를 비교하는 것’에 관해서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비교할 능력부터 없어.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조차 제대로 비교하지 못해. 그럴 여력도, 필요도 없고.
친구 K:
정말 맞아. 깊이 이해할 수 있어.
하나의 체계를 추구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고, 충분히 쓸 수 있으면 된다는 것, 어쩌면 그게 가장 맞는 것 같아.
결국 안에서 답을 구한다는 건 외부의 책과 체계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과 비슷하네. 업장을 걷어 내고 인간 본성의 원래 밝음에 기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거지.
내가 전에는 정합적인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집착했던 건, 책을 얇게 읽다가 두껍게 읽고 다시 얇게 읽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느낌 때문이었어. 모든 책을 다 읽은 뒤 모든 것을 깨닫고 되찾는 천진함, 소박한 본모습으로 돌아간 천진함이야말로 더 높은 수준의 천진함이라고 느꼈지. 나선형으로 상승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뒤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는 느낌 말이야.
그런데 너와 이야기하고 나니 꼭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체계가 없더라도 자성의 빛만 있다면 충분할 수도 있는 거지?
쑤훠이:
- 앞서 말한 것은 여전히 ‘시험형 인재의 병’, 노력 강박, 엘리트주의라는 병이야. 알아차린다는 것은 집착 뒤에 있는 집념과 업장을 보는 거야. 집착을 깨는 것이지. 왕양명의 학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이 읽으면 여러 가지에 방해받고 잘못 이끌리기 쉬워. 책 만 권을 읽고 만 리 길을 다니며 남보다 지혜로워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오해하는 거야.
- 『육조단경』이 혜능이 책을 읽은 적도 없고 글자도 몰랐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이치를 말하려는 거야.
- 평범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봐.
시골 할머니가 행복하고 만족하며 번뇌나 업장 없이 지낸다면, 그것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
친구 K: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나니 조금 이해가 돼.
전에는 시골 할머니는 깨닫지 못한 상태이고, 무지하고, 수준이 높지 않으며, 사변을 거친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했어.
이제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쑤훠이:
자연과 연결될 때, 어릴 때도 이렇게 연결될 수 있었다는 걸 알아차려 봐. 자라서 더 강해지고 미적 감각이 더 좋아졌기 때문에 비로소 연결되는 게 아니야. 지금은 사실 어릴 때만도 못하지. — 어린아이와 평범한 사람들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과 깊은 마음의 지혜가 있음을 느껴 봐. 수행 엘리트주의를 깨는 거야. 그래서 내가 평범한 사람들과의 연결, 마르크스주의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야. 소시민적 괴로움을 깨는 것이지.
친구 K:
핵심을 짚었네. 지금 나는 분명 수행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어.
훨씬 명확해졌어.
쑤훠이:
내 체계는 바로 이 병을 전문으로 다루지, 하하.
선종의 본래의 온전함이라는 이치는 마르크스와 장자의 맥락에 놓으면 더 명확해져.
많은 사람이 선종을 수행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여전히 선종을 수행과 노력 그 자체로 여기기 때문이야. 깨달음을 노력의 결과로 보는 거지. 그러면 선종의 본뜻을 잃게 돼.
친구 K:
나도 전에는 그렇게 이해했어. 수행하고, 생각하고, 이치를 깨쳐야 비로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
지금 들어 보니, 한 사람이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고 다른 업장의 침입과 방해를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실 이미 큰 성공이네.
쑤훠이:
시험형 인재와 소시민은 살아오는 내내 엘리트주의 속에 있으면서 다른 평범한 시골 아이들과의 연결이 끊어졌어. 그래서 엘리트주의에 더 갇히는 거야.
이것이 보통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장자+심리학이라는 체계가 필요한 이유야. 그 뒤에는 깊이 뿌리내린 세계관·인생관·가치관과 인격을 다시 세우는 일이 있어. 마르크스+장자+심리학으로 세계관·인생관·가치관이라는 스파게티 코드를 재구성하는 거지.
쑤훠이:
나는 심리학, 도가, 선종, 마르크스, 철학사 등을 각각 공부했고, 그 여러 갈래가 하나로 모여 인간주의와 본래의 온전함, 사회주의로 이어졌어.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면, 왜 일정 비율의 나쁜 사람이 집단적으로 생겨나는지, 왜 세상이 소외되는지 생각해야 하니까. 여기에는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해.
독서라는 먼 길도 밝음으로 통할 수 있어. 하지만 먼 길이고, 사람들은 자주 길을 잃어.
친구 K:
정말 그래.
그러니 이 길을 끝까지 걸어야만 행복과 평온을 얻을 수 있다고 억지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고, 걸어가면서 둘러봐도 되는 거네.
걷다가 길을 잃으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며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는 공리에 비추어 생각해 봐야겠어.
쑤훠이:
길을 잃었을 때도 네 자성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어.
긴장을 풀어도 돼.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할 필요 없어. 마음을 편히 가져. 세상이 너를 받쳐 줄 거야.
쑤훠이:
오늘 했던 그 말이 참 좋고 중요하다고 생각해. 경제적 자유란 네가 자유롭다고, 충분하다고 느끼는 거야.
철학의 자유, 깨달음의 자유, 행복의 자유도 마찬가지야. 나는 이미 충분히 깨달았고 행복하니 더 바랄 것이 없는 거지.
그 순간 자신이 깨달았다는 걸 알게 돼. 더는 먼 곳의 대가가 필요하지 않아. 이미 대가와 같은 것, 곧 자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는 바로 그 순간, 자성을 보는 것이야. 최근에 「인생의 돈오와 점진적 변화」라는 글을 써서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뤘어.
장자와 마르크스는 우리가 처음부터 늘 세상의 큰 밝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해 줘.
나 자신도 여전히 매일 많은 업장과 번뇌를 안고 있어. 나는 여전히 평범하고 비범하지 않은 사람이야. 마르크스, 엥겔스, 소동파에게도 업장과 번뇌가 많았어.
내 글에는 사실 꽤 명확하게 써 놓았어. 아니, 모든 대가의 글, 선종과 장자, 심리학과 마르크스의 글에는 모두 아주 명확하게 쓰여 있어. 다만 사람들의 업장이 너무 깊어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는 거야.
친구 K:
응, 함께 존재하는 거네. 혼란과 업장이 있다는 걸 똑바로 바라볼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쑤훠이:
맞아. 나는 수용에 관한 연작을 쓴 적이 있어. 평범함을 받아들이기, 업장을 받아들이기,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기.
친구 K:
어떤 사람들은 네 게시물에서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 걸 보고, 잘 모르니 오해해서 더 읽지 않을 수도 있겠네. 많은 사람이 마르크스 철학을 오해하잖아. 너도 알겠지만.
쑤훠이:
응, 인연에 맡겨야지. 글의 힘에는 원래 한계가 있어.
사회과학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피해 갈 수 없어. 그건 과학적 체계이고 사회과학의 뉴턴 역학이야. 없는 척할 수도 없고, 거기에 의지해야 하기도 해. 소시민은 자신의 심리적 질환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마르크스주의를 배워야 해. 내가 서른한 살 때 발견한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야, 하하.
물론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니, 너도 내가 줄곧 마르크스의 사상을 전달하는 데 집착하지 않았다는 걸 봤을 거야. 소시민의 업장은 깨기 어려워. 인연에 맡겨야지.
친구 K:
아주 흥미로워. 지금 소시민들 사이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건 융, 프로이트, 실존주의, 부처잖아. 소시민의 세계에서 마르크스는 사실 상당히 주변부에 있어.
쑤훠이:
그래서 구원받지 못하는 거지, 하하. 전에 실존주의는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해야 한다는 글을 썼는데, 그것도 이 이야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심리학자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도 바로 그런 작업이야. 소시민이 왜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권위와 거대 서사에 기대는지를 다루지. 그는 독일의 유대계 인물로, 1930년대 독일 소시민들이 왜 나치로 돌아섰는지를 연구했어.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 소시민들이 우경화하는 모습을 너도 봤을 거야. 유럽, 미국, 일본의 여러 나라에서 말이야.
친구 K:
정말 대단해. 사실 내가 최근 1~2년 동안 생각한 건 네가 전에 했던 것과 똑같아. 나는 퇴사하고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예를 들어 어딘가로 가서 매일 책을 읽고, 1~2년 동안 수백 권, 수천 권을 읽는 거지. 그래야만 내 체계를 완성하고 몇 가지 일을 이해하며 충분한 마음의 힘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직관이나 감성, 나아가 몸소 깨달은 느낌에 의지해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줄곧 이렇게 이해했어. 먼저 아주 깊은 이론적 틀을 세우고 이성적으로 사고한 뒤에야 감성에 의지할 수 있다는 거야. 지식 체계도 없는 상태에서 영감과 감성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네가 말한 이런 ‘자성의 빛’, 그리고 본래부터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해 보지 못했어.
쑤훠이:
네 깊은 마음도 그 생각, 즉 문을 걸어 잠그고 많은 책을 읽는 것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아. 연결되거나 마음이 움직이는 느낌이 없는 거지.
사실 내가 퇴사하고 책을 읽은 것도 책 속에 무언가 있으리라고 막연히 상상해서만은 아니었어.
2018년에 700권 넘게 읽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어.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독서가 쓸모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 그때는 이미 가치투자로 향하고 있었어. 2019년에 900권쯤 읽었을 때 독서가 쓸모 있다고 느꼈고, 한 줄기 빛을 보았어. 그 무렵 소식, 도가, 심리학으로 향했지. 2020년 10월 국경절 연휴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어. 2021년 퇴사하기 전에는 이미 도가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향하고 있었어. 2023년이 되어서야 선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고, 2024년 윈난에 간 뒤에야 장자를 깨달았어. 퇴사하기 전에 나는 이미 책과 아주 좋은 연결을 맺고 있었어. 그저 내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계속 나아갔던 거야. 이 길 어딘가에 아직 알지 못하는 구원의 무언가가 있다고 상상한 게 아니었어.
쑤훠이:
사람들은 느낌과 감성에 의지해야 하지만, 느낌이 혼란스러워져 사고와 이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사고와 이성은 더 혼란스러워.
결국 깊은 마음의 회복에 기대야 해. 계·정·혜, 바름·고요함·밝음·비움이지. 올바른 사고는 맑고 밝은 깊은 마음에서 나와. 예를 들어 인간 본성의 선악 문제를 생각할 때도 그래. 업장이라는 먹구름이 더는 자성의 빛을 심하게 가리지 않는 거야.
불교는 좋은 것이지만 체계와 유파가 많고 서로 모순되기도 해. 선종은 불교 안에서 사실 소수파야. 많은 불교 유파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종의 길을 인정하지 않아. 이건 아주 큰 주제야. 여기에 불교를 배우는 많은 사람 자신의 수행 강박과 엘리트주의가 강해서, 오랫동안 배워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장자의 장점은 체계가 명확하고 소박하며 실천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점, 그리고 본래의 온전함에 대한 믿음이 더 크다는 점이야.
친구 K:
대략 이해했어. 고마워.
이건 아마 오늘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과 같겠네. 모두가 시와 먼 곳을 동경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시와 먼 곳을 얻지 못할 수도 있어. 또는 얻고 나서도 상상과 다르다는 걸 깨닫고 실망과 혼란에 빠질 수도 있고.
쑤훠이:
시험형 인재는 심오한 철학책의 바다에 빠져, 엘리트로서의 의미 추구와 수행 강박에 가려 진리를 얻지 못해. 도가든 마르크스든 모두 이런 병을 전문적으로 다루지. 중국인들이 소식과 장자를 자주 배우는 것도 이 때문이야.
당송 시대부터 소식, 왕안석, 왕유, 신기질 같은 사람들은 모두 선종과 장자를 함께 닦았어. 왕양명이 유교·불교·도가의 여러 사상을 함께 익힌 최초의 인물은 아니야.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왕양명보다 소식을 더 추천해. 그가 쓴 글이 더 철저하고 실천적이거든.
시와 먼 곳은 곧 현재를 살아가기의 반대말이야. 소식의 일상도 사실 고통으로 가득했어.
그러니 다음에 우리가 이야기할 주제는 현재를 살아가기로 돌아와 진정한 ‘발 디딜 곳’을 찾는 것이야. 계속 철학과 사고에 빠져드는 대신 말이지.
「현재를 살아가기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