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장자 시리즈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노력하는 순간 어긋나니 자연에 맡겨라

一. ‘그 마음을 항복시킨다’는 것은 허구의 개념이다
마음에는 본래의 온전함이 있고,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마음은 스스로 치유된다. ‘그 마음을 항복시킨다’는 말은 마치 마음이 나쁜 것인 듯하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마음이 스스로 치유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심연으로 끌려가는 느낌만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렇게 열심히 ‘수행하고 쉬어도’ 자기 치유가 찾아오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이루어질까?
그 이유는 업장이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줄곧 업장을 없애고 있다. 이 제거 과정에 사람이 개입할 수 있을까? 사람이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수행’이라 부르고, 끊임없이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하는’ 것 역시 깨달음에 관한 미혹이며, ‘수행자 소아의 집념’이다.

二. 인과의 전도, 잘못된 원인 귀속. ‘수행자 소아’의 ‘화물 숭배 수행’
물리학자 파인먼의 ‘화물 숭배 과학’ 이야기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화물을 숭배하는 원주민 무리가 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비행기들은 이 섬들을 거쳐 물자를 수송했다. 원주민들은 비행기가 착륙해 좋은 물건들을 꾸러미째 내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전쟁이 끝나자 비행기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화물을 숭배하던 원주민들은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비행기 활주로와 비슷한 길을 만들고 작은 초가집을 지었다. 그 안에 한 사람이 앉아 머리에 코코넛 껍데기 두 개를 묶어 헤드폰인 척하고, 코코넛 껍데기에 대나무를 꽂아 안테나인 척했다. 이 사람이 흉내 낸 것은 관제탑의 관제사였다. 그러고는 비행기가 착륙해 물자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겉으로는 모든 일을 제대로 한 것 같았지만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파인먼의 이 사례는 바로 교육학과 심리학의 몇몇 미혹을 비판한 것이다. 다만 그 강연에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본아의 ‘높은 에너지 상태’가 소아를 알아차리게 하고, 높은 곳에서 소아와 감정과 생각을 내려다보게 하며, 새로운 인식을 깨닫고 ‘고전’에 공감하게 하고, ‘좌선과 명상’을 할 때 더 좋은 경험을 하게 한다. 고전을 읽고 좌선하고 명상해서 ‘높은 에너지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높은 에너지 상태’를 ‘자신이 열심히 수행해서’ 불러왔다고 착각하며 새로운 집념을 만든다.
노력은 소용없다. 이제 막 이치로 이해한 사람이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우려고 기를 쓰면, 힘을 쓸수록 더 꼬인다. 수행자 소아의 지속적인 집념은 자신을 더욱 엇나가게 한다. 힘을 들이는 순간 어긋난다. 수행은 오히려 모든 노력과 소아를 내려놓고 본아가 스스로 치유되게 하는 것이다.

三. ‘수행과 마음 변화의 단계’라는 문제
고통스럽고 평범한 보통 사람이 어느 한순간 본아가 밝게 빛나는 지극히 선한 완인이나 성인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이에 단계가 있을까? 그 단계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사람은 이 단계에 개입할 수 있을까? 무슨 방법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실제 수행에서 성취를 이룬 그 많은 수행자와 도를 깨친 고승과 큰스님조차 지극한 선에 이르지 못한 것은 수행법의 문제일까,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본아가 소아를 알아차리는 것’에 정말 노력이 필요할까? 소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그저 노력하지 않아서일까?
우리가 본래의 온전함을 최종적인 답으로 여기고, 누구나 본래의 온전함을 느껴 본 적도 있다면, 왜 본래의 온전함은 좀처럼 업장을 없애고 먼지를 모두 쓸어 내며 먹구름을 걷어 내지 못하는 것일까?

四. 마음 변화의 네 단계
첫 번째 단계, 밑바닥과 심연의 단계
밑바닥, 나아가 심연에서 살아가며 업장이 하늘과 해를 가려 빛 한 줄기 없다. 습관에 젖고, 무언가에 홀리고, 마에 사로잡히는 등 깨어나지 못한 단계다. 고통, 감정, 꿈과 물거품 같은 허상, 탐진치, 집념, 소아에 얽매인다. 서로 다른 소아와 상태 사이를 ‘빈틈없이 전환’하며, 결코 깨어나지 않는 ‘꿈속의 꿈’을 꾼다.
두 번째 단계, 밑바닥에서 ‘구름 틈으로 햇빛을 보는’ 단계

  1. 구름 틈으로 햇빛을 보다
    내면의 본아와 외부의 여러 우연한 계기로 사람은 ‘정’, 곧 본아의 영원한 고요함과 천인합일을 알게 된다. 먹구름 틈으로 비치는 햇빛과도 같다. 정은 한 번도 사람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다. 다만 사람이 처음으로 ‘빛’과 ‘따뜻함’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다. 이 빛이 비추자 세상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보고 본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 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행동’이 가져온 결과라고 여기며 ‘수행’에 관해 정리하고 이론을 배우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의식과 행법으로 빛을 불러내기’ 시작한다. 불교에서 계율을 통해 선정에 들거나 좌선하며 숨을 세는 것, 도가에서 장자의 ‘좌망과 심재, 빈 방에 밝음이 생겨남’을 결과가 아니라 ‘수단’으로 삼는 것, 영성 계열의 마음챙김 명상, 심리상담사가 권하는 햇볕 쬐기와 운동과 친구 사귀기, SNS의 위로 글이 권하는 공원 산책과 독서 등이 그렇다. 본질은 모두 ‘덜어 내기’다. 업장의 간섭을 계속 줄이면 구름이 걷히고 해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조언은 실제로 ‘효과가 있다’. 때로는 ‘의식과 행법’을 행한 뒤 실제로 빛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것을 ‘나무를 비벼 불 피우기’라고 여기기도 한다. ‘수행자 소아’는 ‘의식과 행법’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수십 년 동안 좌선하고, 어떤 사람은 수십 년 동안 명상하며, 이것이 자신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흔히 ‘엘리베이터 팔굽혀펴기 성공학’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팔굽혀펴기나 스쿼트를 하거나 박수를 치는 사람이, 팔굽혀펴기 같은 수단 덕분에 높은 층에 올라왔다고 여기는 것이다. 선종에서 말하는 ‘벽돌을 갈아 거울로 만들려는’ 시도다.
    ‘수행자’ 소아는 또한 자주 자신을 감시하고 심리적으로 조종하며, 자신이 정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트집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2. 해가 뜨면 이불을 널다
    정에 들 확률이 높아지고 ‘해가 뜨는’ 일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해가 뜰 때 이불을 널기 시작한다. 자신이 오래된 집념을 ‘계속 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한다. 그러면 더욱더 ‘열심히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운 성과’처럼 보이고, 적극적으로 애써서 ‘해돋이’를 얻어 낸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단계, 산 중턱의 ‘안전 로프, 수영 부표, 심장박동기’ 단계
    산 중턱에 이르면 많은 업장에서 점차 벗어나 더 많은 빛과 풍경을 보게 된다.
    사람은 더 평상해지고 더 쉽게 정에 들며, 자주 정에 들고 깨어 있는 상태에 머문다.
    암벽을 오를 때의 안전 로프, 야외에서 수영할 때의 수영 부표, 심장의 심장박동기와 같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언제든 사람을 받쳐 주고, 언제든 사람을 ‘깨운다’. 심연으로 떨어지게 두지 않는다.
    또는 정은 능숙하게 춤을 이끄는 파트너와 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가끔 한눈을 팔거나 실수하면, 그가 부드럽게 이끌어 다시 마음챙김의 즐거움으로 돌아오게 한다.
    네 번째 단계, 산꼭대기의 내 마음이 밝게 빛나는 단계
    산꼭대기에 올라 보니 드넓은 평원이고, 어디에나 햇살과 따뜻함이 있다. 이곳에서는 성냥도,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우는 일도 필요 없다. 이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의 유적 본질’이다.
    본아의 ‘정’이라는 빛은 줄곧 존재하지만 업장에 가려져 있다.
    수행에는 노력이 필요 없다. 일부러 수행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모든 소아와 노력과 의도가 사라졌을 때, 알아차림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의 상황 알아차림으로 이끈다.
    (내 수준이 높지 않아 뒤쪽 단계는 그저 이러리라고 생각해 본 것이다.)

五. 단계와 과정을 통제할 수 있을까? 자유롭고 주도적인 듯하지만, 실은 모두 운명 안에 있다
앞서 말한 ‘단계’론을 보면 자유롭고 주도적인 듯하며, 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더 나아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 변화의 속도, 본아가 소아를 녹이는 속도를 정말 ‘내’가 통제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업장이 깊고 어떤 사람은 얕다. 이것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을까?
업장은 모두 불행이며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 이 명제는 받아들이기 쉽지만, 더 깊고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추론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중생이 업장에 갇혀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노력’ 때문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타락한’ 것일까? 업장이라는 불행이다. 나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나쁜가, 아니면 나중에 나빠지는가? 즉 태어날 때부터 불행한가, 아니면 나중에 불행해지는가?
어떤 사람은 일찍 깨닫고 일찍 깨어나며 경지가 높다. 이것은 재능, 노력, 영리함, 이해력 때문일까? 운이 유일한 설명이다.
업장의 정도는 불행의 정도이고, ‘깨달음’의 진도는 행운의 정도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깨닫지 못한 것은 그저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이 과정을 앞당길 능력이 있다면, 왜 노력해서 3년, 1년, 반년, 혹은 바로 그날 지극한 선과 완전함에 이르지 않는가?
업장이라는 운은 불평등하다. 인생은 본래 불평등하다.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비교해 평등한가? 어떤 사람은 장애가 있어도 부유하고 행복하게 사는 데 지장이 없고, 수행하는 데도 지장이 없다고 말한다. 업장의 깊고 얕음에 따른 불평등은 장애 문제보다도 더 불평등하다. 그렇다. 사람에게는 장애보다 더 심각한 상태가 있지만 자신은 모른다. 그 상태 자체가 ‘모르는 것’이다.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마음 변화의 단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행자 소아’의 집념을 알아차리면, ‘다른 사람을 바꾸고’, ‘다른 사람을 일깨우려는’ 집념도 내려놓게 된다. 사람마다 자기 ‘운명’의 속도가 있다.

六. 본래의 온전함은 사람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며, 지금의 진도와 속도가 곧 자신이 온 힘을 다한 속도라는 뜻이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이에 관해서는 과거에 이미 많이 썼다. 이를테면 《본래의 온전함》과 《노력에 관한 특별 토론》 같은 주제별 글들이다.
이 글에서는 작은 한 가지만 쓰겠다.
자신이 즐겁고, 내적 동기가 있고, 적극적이고, 에너지가 높고, 고요할 때를 일기에 기록해 보기를 권한다.
이것 역시 점차 정에 들어가는 과정이다.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다.
이것은 사실 각자의 본래의 온전함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진정한 즐거움은 모두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종의 ‘고요한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것이 바로 ‘정에 듦, 본아’의 느낌이다. 다만 너무 짧고 너무 ‘평범해서’ 스스로 무시하고 가볍게 여겼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지금 소도시 농구장에서 무리하지 않고 느긋하게 농구를 하며 슛을 던지고, 노년부터 중년과 청소년까지 함께하는 사람들과 서로 공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이미 ‘본래의 온전함’과 고요함과 지극한 즐거움을 느낀다. 더 바랄 것이 없다.
이것이 사실 일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예전 십여 년 동안은 일기를 주로 메모와 잡념과 자기비판을 기록하는 데 썼다. 전략이 잘못되었고, 깨어 있지 못했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모두 지나간 일이다.

七. 도가의 ‘운명을 믿음’, 인간의 유한함과 복잡하여 통제할 수 없는 운명

  1. ‘사람의 일에 순응하고 천명을 편안히 받아들인다.’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한다’가 아니다. ‘다한다’는 말에는 여전히 ‘노력과 미련’이 들어 있다. 자신은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자신’은 그저 ‘자신의 행위’에 순응할 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그저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뿐이다. 머리카락을 들보에 매달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듯 공부에 매달렸든, 불안에 떨었든,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척했든, 학교를 빼먹고 PC방에 갔든, 스스로 천재라고 여겼든 말이다.
  2. ‘운명을 믿는다’는 것은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운명은 계속 변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 바로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괴로워한다. 바로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정해져 있지 않은’ 듯 보이고, 마치 ‘인간의 의지가 하늘을 이길 수 있는’ 듯하며, ‘의식과 행법으로 해를 구하고’, ‘엘리베이터 팔굽혀펴기 성공학’을 실천할 수 있는 듯하다.
  3. 운명을 믿는 것은 ‘운명에 체념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알 수 없으므로 애초에 체념하며 받아들일 운명 자체가 없다.
  4. 운명을 믿는다고 ‘점을 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운명은 점으로 알아낼 수 없다.
  5. 운명은 통제할 수 없고 손에 쥘 수 없다. ‘운명을 손에 쥐라’는 것은 늙다리 남자가 성희롱할 때나 하는 대사다.

八. 생명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생명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본아는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그저 이 강물 속에서 고요히 살아가며, 주어진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흐름에 순응하며 걱정 없이 지낸다. 마음은 자연스럽게 일을 하고, 생명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흐른다.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일에는 운명의 불확실성도 얽혀 있고, 받아들이고 조정하는 일도 얽혀 있다. 언제나 생명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렀을 뿐이다. ‘노력’이라는 말은 애초에 없었다. ‘노력’은 소아가 스스로 감동하며 하늘의 공을 가로채는 것일 뿐이다.
사람은 사실 동물이나 식물과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바꿀’ 수 없다. 개미는 먹이를 쌓아 두고, 벌은 꿀을 모으고, 제비는 둥지를 짓고, 고양이와 개는 짝을 찾고, 공작은 꼬리를 펼치고, 사자는 상처를 핥고, 식물은 햇빛을 향하고, 큰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파리지옥은 벌레를 잡는다. 사람도 다른 생물처럼 자연계와 생물권 속에서 생물학적·물리적·역사적 법칙에 따라 살아가다가 죽는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듯 전능하고 죽지 않으며 돌을 금으로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고,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한다.
장자는 사람이 헤엄치는 물고기나 나비나 나무처럼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주가 마련한 생명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명은 본래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과 무작위성에 지배된다. 나무 한 그루처럼, 자랄 수 있을지,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는 운명에 달렸다. 그렇다고 나무가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나무의 본래의 온전함과 완전함, 생물의 평등, 천인합일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나무에는 소아가 없고, 다른 나무가 키가 크고 아름답게 자란다고 질투하지도 않는다.

九. 자유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자유는 존재할까? 대체 어디에 있을까? 사람은 언제나 물리 법칙과 유한한 생명에 제한된다. 사람은 본래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이며, 대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다. 사람이 대자연을 개조하는 것은 곧 대자연이 자신을 개조하는 것이다.
사람이 말하는 자유, 능력, 인간의 의지로 하늘을 이긴다는 것은 흔히 소아의 탐진치일 뿐이다.
‘non-non-free’, 곧 ‘자유롭지 않음이 아님’도 일종의 자유다. 자유란 부자유가 어느 정도까지 줄어든 뒤 본아가 느끼는 감각이다. 즐거움이 불쾌함이 어느 정도까지 줄어든 뒤의 감각이고, 고요함이 고요하지 않음이 어느 정도까지 줄어든 뒤의 감각인 것처럼 말이다. ‘도를 추구하면 날마다 덜어 낸다’, ‘빈 방에 밝음이 생겨난다’. 우리가 ‘운 좋게’ 운명에 더 많이 순응할수록 ‘소아의 업장’이 줄고, ‘자유롭지 않다’는 느낌도 줄어든다.

十. 수행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업장과 상태의 기복과 운명을 받아들이며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행자 소아’는 상태의 기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의 평범함과 업장과 뜻대로 되지 않음과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식과 행법’에 집착하고, 상상 속의 아름다운 미래에 집착한다. 이것 자체가 업장이다. 《새로운 소아의 탄생: 수행자 소아》를 참조하라.
‘내가 지금 충분히 즐겁지 않고 충분히 정에 들지 못하는 것은 수행에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내 수행법과 영적 스승의 수준이 아직 충분히 높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무서운 집념인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노력=소아에 사로잡힘이다. 이를 ‘노력 소아’라고 부른다. 아주 흔하고 무서운 소아다. 앞서 《노력에 관한 특별 토론》에서 이미 노력을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수행자’ 소아는 ‘노력 소아’의 한 변종이다.
내가 ‘수행’을 의식하기 시작한 뒤로 나는 늘 ‘열심히’ 수행했고, ‘수행자 소아’와 ‘노력 소아’는 늘 나를 감시하고 심리적으로 조종했다. ‘노력 소아’를 완전히 죽이고 나서야 나는 노력을 완전히 끊었고, 온전히 자연스러워졌다.
내면에서 구한다는 것은 허구의 개념이다. 욕망도 추구도 없이 자연스러움에 따른다.
한 누리꾼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일류가 될 수 있나요? 노력, 끈기, 선택, 재능 중 무엇에 달렸나요? 보통 사람은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나요?’ 보통 사람은 대체로 보통 사람이다. 맹목적으로 무슨 일류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평범하다고 해서 범용한 것은 아니다. 본래의 온전함이 있고, 모든 사람의 영혼은 평등하며, 고요함과 행복과 즐거움은 일류인지 아닌지와 관계없다. 물론 이 상태도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운에 달렸다. 이 상태에 이르면 ‘보통 사람’이라도 흔히 ‘일류’가 된다. 주어진 때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운명에 순응하며 자연스러움에 따른다.

十一.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연스러움에 따른다
궁극적인 답은 사람이 궁극적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는 어떤 답도 찾지 않으면, 피안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저 고요히 살아갈 뿐이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며 자연스러움에 따른다.
사람들이 이 글을 소극적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장자 자신도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내게 무슨 대단한 덕이나 능력이 있겠는가. 오해를 받아들이고 자연스러움에 따른다.

덧붙임:
一. 노력이라는 주제에 관한 보충:
앞선 글 《노력에 관한 특별 토론: 어서 노력을 멈춰라》
A. 그렇다면 심리치료사의 ‘노력’과 ‘개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심리치료사는 정원사이지 외과의사가 아니다. 정원사가 장미가 피어난 것이 모두 자신의 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심리치료사는 한 사람을 평범함과 업장에서 ‘밝고 완전한 상태’로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심리치료사 자신과 그의 ‘지식’, ‘치료법’은 모두 역사 발전의 결과이며 사회의 유기적 구성 요소다. 당사자의 ‘본아-업장’ 대립에는 고유한 속도가 있다. 그가 스스로 심리치료사를 찾아가는 것, 심리치료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모두 그 흐름의 일부다. 이 사람의 상태가 원래 좋아지고 있었는데 해고되어 일자리를 잃은 뒤 다시 나빠졌다면, 그것을 심리치료사가 결정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의지는 언제 이 흐름에 개입할 수 있을까?
B. 과학자는 줄곧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과학자들이 줄곧 ‘열심히 분투’했기에 과학은 계속 진보하고, 지식은 갈수록 발달하고, 생산력과 인류의 운명은 계속 크게 바뀌며, 인류 사회의 문명 수준도 꾸준히 높아진 것이 아니냐고. 그렇다.
하지만 앵무새는 말을 하고, 고양이와 개도 사람에게 맞추는 법을 배워 모두 점점 더 잘 살아간다. 그들도 노력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순응하는 것일까?
게다가 인류 역사에 개인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을까?
지구의 60억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바꿀 수 있는가? 프롤레타리아는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과학자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인가?
과학자 자신은 어떻게 살고 있고, 업장은 어떠한가? 역사적 유물론이야말로 운명이다.
C. 소도시의 시험 수재가 극빈 농촌에서 시험을 통해 베이징으로 진출하고, 승진하고 연봉이 올라 CEO가 되는 것은 하늘을 거슬러 운명을 바꾼 것 아닌가?
그렇다면 왜 건국 이전 수천 년 동안에는 그렇게 해낸 소도시의 시험 수재가 드물었는데, 1990년 이후에는 수많은 사람이 해낼 수 있었을까? 이것은 역사의 흐름이지 개인의 노력이 아니다. 그러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정말 그저 하늘을 거슬러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일까? 운명 앞의 겁쟁이이자 바보인 것일까? 그렇다면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수십억 아이들은 왜 해내지 못하는가?
바로 이렇게 ‘뼈를 깎는 노력’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자녀를 몰아붙여 아이들을 무너뜨린다. 이 아이들의 운명은 좋은가? 이 아이들이 심리적 문제나 좋지 않은 학교와 직장에 빠져들 때, 그것은 그저 부모 세대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것이 그들의 업장이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두 세대의 심리적 문제는 모두 운명과 시대의 일부이며, 치유될 수 있을지도 운명에 달렸다. 많은 어머니가 이 두 세대를 치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더 많은 어머니는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괴로워하며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받고 있다.
일깨운다는 것은 허구의 개념이다. 마치 최고의 혁명가와 교육자와 심리학자가 시도해 보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역사적 유물론과 운명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엘리트들은 40세에 해고되어 일자리를 잃었을 때 왜 ‘열심히 운명을 바꾸지’ 않는가? 왜 ‘사회 전반의 여건을 탓하지 말고 자기 문제를 더 찾아보라’고 하지 않는가?
어떤 누리꾼이 물었다. 대학생에게 돌파구를 찾을 방법이 있느냐고. 뚫고 나갈 수 없어야 갇힌 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누구나 최선을 다했으며, 모든 것은 운명이다. 평범함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못함도 받아들이며 자연스러움에 따른다. ‘뭔가 열심히 해 보라’는 말은 마치 그 사람이 아직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
D. 나쁜 사람은 노력해서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내가 나쁜 사람이고 내 주변 사람들을 엉망으로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그래도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조차 흔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제로 바뀌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의 온전함과 본아의 강함, 자기 치유 능력의 강함을 보여 준다.
게다가 업장이 특히 깊고 무거운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 ‘의식’이 바로 본아의 알아차림이다.
이렇게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사람이 간단히 개입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는 수천 년 동안 법률과 판사와 교사가 있었다. 개입할 수 있었는가?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진보하면서 전쟁, 기근, 식인, 흉악 범죄가 모두 크게 줄었다. 이것은 역사가 작용하는 것이다.
E. 그렇다면 농민 봉기와 반란과 혁명은 노력으로 운명을 바꾼 것 아닌가
아니다. 봉기와 혁명은 모두 시대의 산물이다. 개인의 노력은 애초에 작용하지 않는다. 봉기와 혁명은 역사를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역사 자체의 산물인가?
그렇다면 사람 사이의 불평등도 극복할 필요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가? 뜻밖이겠지만, 정말 그렇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틀렸다는 말인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과학 이론이다. 사유제가 낳는 불평등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혁명을 가져오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역사의 법칙을 설명하며, 사람이 역사에 어떻게 순응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모든 불평등을 없애고 역사의 변화를 앞당기는 마법이 아니다.
사람의 키와 체형은 영원히 서로 다르다. 마르크스주의가 관심을 두는 것은 키와 체형의 차이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예속을 낳지 않게 하는 것이다.
F. 체중 감량은 ‘노력’과 관계없다
체중을 감량할 때 겉으로는 내가 수많은 것을 극복하고, 운동처럼 괴로운 일을 잔뜩 해낸 것 같다. 실제로는 소아의 탐진치와 폭음·폭식,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업장이 약해져, 몸과 마음이 본래 바라던 운동과 배가 70%쯤 찰 정도의 담백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본아의 작용이며, 마침 본아가 업장을 이길 수 있었고, 외부 조건 역시 담백하게 먹고 충분히 자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체중 감량은 노력과 가장 관계없는 일이다. 업장에 맞설 힘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살을 빼려’ 할수록 더 좌절하고 침체되며 살이 찌는 모습을 흔히 본다.
G. 무서운 것은 ‘노력’으로 이익을 얻는 일이다
암묵적인 관행에 영합하고, 사기 치고, 속이고, 투기하고, 배신해서 이익을 얻는다.
‘내’가 마음의 본능을 ‘애써 이겨 내고’, 역겨움을 참으며 싫어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불법적이거나 회색지대에 있는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이것은 업장이 깊어진 것이다. 부정적인 소아가 힘을 쓰고 있으며, 사회의 소외가 부정적인 소아에 보상을 주고 강화하고 있다.
많은 업계와 조직에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업장이 공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와 나치다.
본아가 이런 효과에 맞설 수 없다면 삶은 지속적인 타락이 된다. 타락은 생명 자체가 향하는 방향이 아니다. 외부의 소외이며 불행한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