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조: 현실적 자기가 리비도와 함께하기
一. ‘나’의 구조도
a.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나’, 호나이가 말한 ‘현실적 자기’는 표층의 언어적 사고+감정 체계+직관+일부 업장(거짓 자기 등)을 포함한다. = 표층과 중간층의 나.
b. 더 깊은 층의 나, 마음의 힘/리비도/정신역동은 두 측면으로 나뉜다.
a. 트라우마, 방어 등의 업장.
b. 본래의 온전함을 지닌 본래적 자기.
二. 리비도: 심층 마음
- 인간의 근본은 리비도이며, 과제는 결국 리비도의 과제다
《마음의 힘/리비도가 운명을 결정한다》: 결국 방향을 정하고, 일하고, 생각하고, 과제를 마무리하고, 친구를 사귀고, 본래적 자기의 평온을 누리고, 승화로 나아가는 것은 리비도이지 현실적 자기가 아니다.
나를 치유하는 것 역시 리비도다. (앞선 글 《‘내면아이’가 나를 치유하고 있다》, 《장자의 제물론과 마르크스: 표층의 언어적 사고 VS 심층 마음》)
과제는 계속 반복된다. 그것을 알아보고 해결하여 리비도가 성장하고 승화하며 업장을 소화할 때까지.
인격적 매력은 리비도에서 나온다. 쩡치펑: 생명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면 성적 긴장력이 되고, 안으로 향하면 성적 수축력이 된다. - 리비도도 참 힘들다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돌보는 일이 중요하다. 지난 몇 년간 리비도는 정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나 힘겨웠다. 나는 좀 더 일찍 그의 감정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리비도는 큰 타격을 입었고, 마음의 힘은 손상되었다. - 리비도 자신도 지금 내적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에게는 업장과 본래적 자기라는 두 부분이 있다. 반면 ‘현실적 자기’는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보는 아이처럼, 상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직원처럼 허둥지둥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이랬다저랬다 한다.
현실적 자기의 사고는 차분해져야 한다. 본래적 자기가 업장을 치유하기를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현실적 자기가 혼란스러울수록 혼란을 더 보태고, 업장을 돕게 된다. - 심층 마음/리비도는 저절로 작동하고 있다
자성은 자연스럽게 치유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일부러 애쓰기’나 ‘수행’ 없이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버텨 내고, 날마다 고된 노동을 이어 간다.
밖에서 구한다. 본래적 자기에는 조건 없는 자양분이 있다. 조건 없는 본래적 자기의 평온과 자유로움이다.
三. 리비도와 에너지
- 리비도는 바깥으로 투여되며, 좌절하면 퇴행하여 안으로 향한다. 안으로 향할 때는 자기 공격과 내적 소모가 많아지고 에너지가 낮아진다. (앞선 글 《지옥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 리비도는 마음속 극장에 지옥을 만든다》)
사람의 내적 에너지는 본래의 온전함을 지닌다. 에너지는 어디로 갔을까? 상태가 낮을 때는 반드시 업장이 높다. 한 가지는 업장과 주제가 뚜렷한 경우다. 상태가 낮고 괴롭고 우울하더라도 원인을 ‘안다’. 다른 하나는 ‘늘 그러려니’ 하며 원래 그런 것이라고 여기고, 원인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자신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리비도가 안으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 리비도의 눈덩이 효과: 마음챙김, 몰입, 긍정적 피드백, 자양분, 치유는 리비도를 점차 성장하고 승화하게 한다. 오랫동안 피드백이 적거나 부정적이거나 유해하면 리비도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고 무기력해진다. (앞선 글 《리비도가 운명을 결정한다》)
- 물론 단순한 선형적 투입과 산출만은 아니다 二. 사고 VS 심층 마음(리비도)
四. ‘현실적 자기’야말로 ‘작은 자아’다
- 최종적으로 소화되는 것은 현실적 자기이며, 최종적으로 온전하고 원만해져 자신을 대표하게 되는 것은 리비도다
‘나’가 ‘내면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내면은 나쁘고 병들어 있고, ‘나’는 전지전능한 초자아이자 엄격한 부모이며 채찍을 든 감독관인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는 ‘내면의 청년’이 ‘나’를 치유한다.
때로는 현실적 자기가 리비도 곁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제 어른이 되었고 그 일들은 지나갔다고 말한다. 때로는 리비도가 나를 돌보며 친구야,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당황하지 말라고 말한다. 불안은 사고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행동을 흐트러뜨린다. 이로부터 근본은 리비도임을 알 수 있다.
마침내 현실적 자기와 리비도가 원융하고 업장이 사라지며, 본래적 자기의 본래의 온전함이 드러나 내 마음에 연꽃이 핀다.
지극한 사람은 마음을 거울처럼 쓴다. 가는 것을 따라가지 않고 오는 것을 맞으러 나가지 않으며, 응하되 간직하지 않으니, 사물에 잘 대응하면서도 상처받지 않는다.
앞선 글 《장자의 제물론과 마르크스: 표층의 언어적 사고에서 심층 마음으로》 - 현실적 자기는 매우 제한적이다
a.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리비도가 감상하고 느끼는 것이다. ‘현실적 자기’가 예술을 뭘 알겠는가.
b. ‘현실적 자기’는 ‘쓸모없음의 쓸모’도 이해하지 못한다. 공원의 큰 나무 아래에서 하루 종일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현실적 자기가 어떻게 알겠는가.
c. 현실적 자기의 사고에는 철학적 문제를 사유할 능력이 없다. 철학과 경지는 언어와 문자, 교조적 암기로 얻는 것이 아니라 리비도의 공명과 깨달음으로 얻어야 한다. 리비도는 도에 가깝다. 이 안에 참뜻이 있으나, 분별하여 말하려 하면 이미 말을 잊는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과 감정은 리비도의 영역이다. 사고가 아니라 종합적인 마음의 작용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는 법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五. 사고의 혼란과 좌초
- 이성적 사고는 믿을 만하지 않다
이성적 사고는 이성적이지 않으며, 뒤섞여 있고 모순된다. 본래는 느낌에 의지해야 하지만 느낌이 혼란스러우니 사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고는 더 혼란스럽다.
사고의 차원에서 막다른 골목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많은 부정적 사고와 이리저리 뻗는 잡념은 깊은 층의 업장과 트라우마, 부정적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신성은 사고의식이 아니라, 저절로 묵묵히 작동하는 자성이다.
우리는 흔히 방 안에서 골똘히 생각하며 자신을 소모하다가, 아래로 내려가 봄바람을 맞으면 마음이 일렁인다. 그 순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이전에는 막다른 골목을 파고들며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사고의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을 기록하고 지켜볼 뿐이다.
일기를 쓰거나 산책하면서 마음 상태가 서서히 안정되는 것을 지켜본다. 탁한 물이 맑아지는 데 필요한 것은 업장의 휘저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거센 비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은 더 고요해진다.
일기를 쓰고 산책하는 일도 자연의 일부이며, 그뿐이다. 노력이나 ‘수단’이 아니다. - 사고하는 현실적 자기는 왜 본래적 자기의 평온한 알아차림이 아니라 업장에 동조하며 한쪽 편을 드는가.
업장과 본래적 자기가 내적 싸움을 벌이고, 리비도가 과제를 처리하고 있기에 에너지가 낮다. 업장의 일부가 “너는 에너지가 낮아서는 안 돼, 그럴 수 없어”라고 말하면 현실적 자기의 사고는 “맞아, 너는 에너지가 낮아서는 안 돼, 그럴 수 없어”라고 말한다. ‘현실적 자기’와 언어적 사고는 혼란을 더 보탤 뿐이다. 업장을 돕다가 일을 망치는 동료이며, 전능한 자기애와 열등하고 허약한 내적 핵심이 만들어 내는 잡념의 흐름을 ‘표시’하고 있다.
현실적 자기가 혼란만 보태지 않아도 대단한 일이다. 인간이 생각하면 본래적 자기는 쓴웃음을 짓는다.
습관적인 과잉 사고와 업장이 일으키는 심신의 긴장은 업장 패턴의 일부다. 익숙한 고통, 혼란, 분주함, 다채로운 감정 자극이다. 마음속 작은 극장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이는 리비도에게 익숙한 투여 방향이자 에너지 흐름의 패턴이다. 리비도는 감독이자 작가이자 배우이고, 사고하는 현실적 자기는 허둥지둥하며 스스로 장면을 덧붙이는 촬영 담당이다. 심지어 자신을 주인공+감독+제작 총괄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 혼란스러운 장면 자체가 리비도가 기획한 혼란스러운 연극이다.
건강한 패턴에서는 리비도가 성숙하고 건강하며 바깥으로 향하는 유기체이고, 사고하는 현실적 자기는 조용히 지켜보며 알아차린다. 리비도가 콧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동안 현실적 자기의 사고는 그저 가만히 화음을 넣는다. 그것은 인간의 일부 보조 기능일 뿐이다. 뇌경색으로 일부 영역의 사고와 기억 기능을 잃은 환자도 여전히 온전한 사람이며, 평온하고 행복하고 즐겁고 자유로울 수 있다.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적 사고가 없지만, 여전히 깊이 있는 사고 논리를 지닌다. - 무의식의 의식화
이것은 사고하는 현실적 자기의 발전 방향이자 정신분석의 치유 수단이다.
六. 현실적 자기가 리비도와 함께하기: 들쑤시지 않기, 무위
본래적 자기는 방향을 알고 모든 것을 안다. 그(리비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른다. 현실적 자기는 그저 곁에 있고, 들쑤시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따르며, 무위에 머문다.
왜 힘을 주면 결과가 몹시 나쁠까? 애쓰고 힘을 들이는 순간, 그것은 리비도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자기나 작은 자아가 힘겹게 들쑤시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싹을 뽑아 성장을 재촉하기:
많은 경우 현실적 자기와 작은 자아는 리비도의 성장을 억지로 재촉하며, 마음의 힘/리비도에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한다. 그러고는 돌아오는 피드백도 별로 없다. 리비도가 얼마나 괴롭고 실망스러울지 짐작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태산을 오르면서 마실 물도 얻지 못하는 안내견과 같다. 지쳐서 더는 사랑할 힘도 없다.
침체된 지금 이 순간에 함께하기:
막막하고 침체되었을 때 현실적 자기와 작은 자아는 자꾸 뭔가를 들쑤시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재를 살아가기에 더 충실하고, 더 조용히 리비도 곁에 있어야 한다. 허용하고, 따르고, 긴장을 풀고, 귀 기울이고, 함께하며, 리비도가 스스로 빠져나오게 한다. 그를 관찰한다. 왜 침체되었는지, 왜 자신을 소모하는지, 왜 맴도는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지 들쑤심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기는 PUA식 심리 조종이 아니다. 절정과 높은 주파수 속에서도 살고, 저점과 낮은 상태 속에서도 사는 것이다.
인지와 느낌의 일치:
인지와 깊은 느낌의 분리는 심리상담사가 흔히 다루는 문제다. 그의 실제 느낌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적절히 묘사하고 명명하여 인지와 느낌이 일치하게 하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며, 현실적 자기와 리비도가 서로 모순되고 양립하지 못하는 대신 조화를 이루게 한다. 알아차림+인지, 의식적 알아차림 수준의 발전이다.
七. 내가 리비도와 함께하기
- 함께하기
고등학교 3학년 학생 곁에 있는 것과 같다. 그가 아직 감정이 흔들리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쉬고 싶다고 외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상당히 좋은 상태다. 무감각하고 마음이 잿더미처럼 식은 상태보다 훨씬 낫다. 그의 곁에서 충분히 쉬게 해 준다.
남편이나 아내 곁에 있는 것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함부로 조언하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함께하는 일이다.
소액 주주가 핵심 기술 인력과 영업 관리자의 곁에 있는 것과 같다. 일하는 것은 그이고, 명성과 이익을 얻는 것은 당신이니, 혼란을 보태지 말자.
화상이 반 고흐 곁에 있는 것과 같다. 할 일은 함께하고, 지지하고, 혼란을 보태지 않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리비도가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쉬고 쉬고 또 쉬기, 긴장을 풀고 풀고 또 풀기다. - 나는 리비도와 함께 살아간다
산책은 리비도가 하는 것이다. 잡념도 마음챙김도 모두 그다. 주변은 새롭고, 온화하고, 익숙하고, 외부에 있고, 현재에 있는 자극이다.
식사는 리비도가 하는 것이다. 폭식도, 전혀 입맛이 없는 것도, 맛있게 먹는 것도, 몰입하여 마음챙김을 하는 것도 모두 그다.
잠은 리비도가 자는 것이다. 불면도 숙면도, 악몽도 좋은 꿈도 모두 그다. ‘나’가 수면에 간섭하고 통제하려 할수록 괴로워지고, 흐름을 따르고 자연스러워질수록 편안해진다.
콧노래는 리비도가 부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분을 흥얼거린다. 머리로서의 나는 그런 이성적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고, 그런 가락과 말을 지어낼 수도 없다. 머리의 나는 그저 관찰하고 기록하며, 가끔 리비도의 가사에 웃음이 난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 오토바이를 탔을 때.”
현실적 자기는 예술을 모른다. 모두 리비도가 조용히 감상하는 것이다.
내가 쓴 많은 글에서는 누구에게나 매일 찾아오는 본래적 자기의 평온한 ‘순간’을 일상에서 알아차리고, 본래적 자기의 평온과 본래의 온전함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키우는 것이 치유의 한 과정이라고 본다. - 나는 리비도와 함께 일한다
리비도를 존중하며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른다. 성과와 창의성은 리비도에서 저절로 나오며, 기량과 무르익는 정도, 기세도 리비도가 정한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는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달래듯 리비도를 달랜다.
부록: 이 체계는 융의 체계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융의 구분에서 의식적 나(자아 ego)는 사고의식+업장을 지닌 작은 자아(트라우마, 심리적 방어기제) 등을 포함한다. 한편 그는 리비도를 ‘심리 에너지’라고 부르며, 이는 본래적 자기이자 근원에 해당한다. 반면 내가 이해하는 의식적 나는 사고의식+감정 체계+직관+일부 업장(거짓 자기 등)으로 이루어진 표층과 중간층의 나다. 리비도는 업장+본래적 자기이며, 두 부분의 혼합이다.
핵심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a. 순수하고 원만한 본래적 자기를 더 신뢰한다. 융 계열은 프로이트 계열보다 본래의 온전함을 더 신뢰하지만, 마르크스주의나 장자와 선만큼 신뢰하지는 않는다. 불교의 ‘점수파’에 해당하며, 지금 이 순간의 원만함, 구함도 증득함도 없음을 말하는 선종과는 다르다. 업장(먹구름)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본래적 자기의 평온(푸른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며, 구름이 많은 날도 좋은 날씨다.
b. 융은 자성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며, 리비도가 승화하여 도달할 목표라고 본다. 반면 나는 본래적 자기의 자성이 리비도를 이루는 두 부분 중 하나이며, 늘 존재해 왔다고 본다. 융은 헤겔의 변증법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의 ‘자성/본래적 자기’ 개념은 독일 관념론의 ‘절대적 동일성, 절대정신’과 조금 닮았다. 도달하기 어려우며 변증법적 발전이 지향하는 이상적 목표, 소수의 사람과 엘리트만 노력을 통해 도에 이를 수 있는 이상적 목표다. 곧 마르크스가 비판한 “인간의 유적 본질을 신으로 삼아 머리와 발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 장자, 선종은 인간의 유적 본질과 본래의 온전함은 언제나 존재하며 누구나 지니고 있고,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오히려 중상층과 엘리트의 업장이 더 깊다고 본다.
c. 융은 콤플렉스, 그림자, 하위 인격, 인격의 파편 등(업장)을 자아 ego가 통합해야 할 내용으로 본다. 여기에는 대량의 심리 에너지(리비도)가 소모된다. 주도권은 자아 ego에 있으며, 흔히 ‘노력’, ‘내가 내면아이를 치유한다’를 암시한다. 반면 이 글의 체계, 또는 도가 계열 심리학은 ‘내면의 청년이 나를 치유한다’고 본다. 치유의 근원은 깊은 층 자체에 있다. 상처가 아물게 하는 회복력이 뇌가 아니라 유기체와 생명력 자체에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또한 “때때로 부지런히 닦아 먼지가 앉지 않게 하라”와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앉으랴”의 차이다.
d. 융은 리비도를 ‘하나의 전체이며 비교적 순수한’ 것으로 본다. 반면 나는 리비도가 혼합되어 있고 모순적인 것이지만, 전체로 작용하며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본래적 자기의 원만함과 리비도의 괴팍함, 자기 폐쇄, 자기 공격을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
부록 2: 인간의 세 층 마음은 세 층 AI와 같다
인간의 세 층 마음은 표층 사고(뇌), 리비도(심층 마음+감정+마음의 힘+업장 등, 무의식, 마음), 자성이다. 세 층 AI에 빗대어 볼 수 있다.
- 표층 사고(뇌)는 저렴한 AI다
일상적인 ‘노동’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CPU를 맹렬히 돌리지만, 흔히 환각이 심하고 초점이 빗나가며, 외부와 상호작용할 때 혼란과 오도, 오류와 정체가 생긴다. 맥락은 작고 어수선하며, 실제 전체를 보지 못할 때가 많고 주의의 폭이 좁아진다.
- 리비도(마음)는 비싼 AI다
구조(세계관·인생관·가치관, 자기 구조), 방향, 진도, 자원 배분, 검토를 결정한다. 맥락 창이 크고 모든 것을 안다.
다만:
a. 뇌를 호출하여 일해야 하므로, 뇌와 외부 세계의 온갖 과제에 제약받는다.
b. 그 자신에게도 업장(방어, 내적 소모, 감정 등)이 있다. 이것은 당연히 더 까다롭고 ‘근원적인’ 과제이며, 정신분석이 자리 잡는 지점이기도 하다.
마음의 힘은 흔히 리비도의 내적 소모(작은 자아의 전쟁 등)에 쓰인다.
(세 층 마음은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이며, 실제로는 두 층이다. 리비도 안에는 자성의 밝음, 심층 마음, 메타인지가 있다. 리비도는 혼합체다.)
머리와 발의 자리를 바로잡는 과제
마음이 뇌를 호출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사고는 많은 경우 리비도의 내적 상태를 합리화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주식 투기자의 온갖 사고가 그렇다. 또 앞일을 미리 불안해하는 것은 리비도가 현재 느끼는 불안을 뇌의 헛돌기와 미래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상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을 반추하고, 지나치게 힘을 쏟는 것 역시 리비도의 긴장된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신화’의 성장은 리비도가 사고와 더 잘 연결되어 사고의 헛돌기를 멈추고 뇌를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이성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며, 자신을 달래고 돌보는 것이다.
이른바 ‘수행병’, ‘노력 강박’의 문제는 사고로 마음에 개입하고 마음을 통제하려 한다는 데 있다. 방향이 틀렸다. 해야 할 일은 쉬고 치유하는 것뿐이다. 마음의 힘이 회복되면 리비도가 자연스럽게 뇌를 호출한다. 뇌는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할 필요 없이 리비도가 호출하기를 기다리면 된다.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뇌가 생각하면 리비도는 웃는다.
- 자성은 RSI다(RSI 과정을 통제하는 고급 지능)
구체적인 행동에 참여하지 않지만, 앞의 두 층 AI를 최적화하여(자동으로/자연스럽게) 더 지능적인 AGI를 향해 진화하게 한다.
자성은 추상적이지만 객관적인 메타 마음이다. 그 객관성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자성의 밝음, 2. 마음의 힘의 재생.
자성은 사람이 건강, 치유, 정신화, 평온한 행복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자연스럽게 보장한다. ‘깨달음’은 인간 성장의 한 지점일 뿐이다. 업장이 끊임없이 줄어들고 자성의 밝음이 자연스럽게 작용하며, 소박함으로 돌아감->용암->깨달음->고요로 이어진다.
반대로 중년의 평범함->속물스러움->유해함으로 악화되는 추세는 자성이 업장에 심하게 가려져 작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과정은 사람의 힘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안배이며, 리비도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날뛰는 마음이 쉬면 그것이 곧 보리다.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킬 것인가? 1. 마음은 항복시킬 필요가 없다. 자성은 밝고 자연스럽다. 2. 마음은 ‘항복시킬’ 수 없으며, 리비도가 자연스럽게 고요해지기를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좋아지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나빠지는 것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