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장자의 심리학 마르크스 + 장자 철학 · 누구나 본래 온전하다

장자 시리즈

일、실제 삶에서 현재를 살아가기

일、실제 삶에서 현재를 살아가기
현재를 살아가기는 수단이 아니라 상태다. 누구나 경험해 보았다. 누구나 천인합일, 평온, 지극한 기쁨을 경험해 본 것처럼. 중국의 수천만 재학생과 십수억 사람들, 저마다의 자성의 빛은 각자의 인생에서 마주한 곤경 속에서 묵묵히 작동하고 있다.
(一)현재를 보고 기록하기
1.허용하고 받아들이기.
모든 고통과 감정을 허용한다.
괴로움, 평범함, 저조한 상태, 낮은 경지, 회피, 미루기를 허용한다. 절망(질식할 듯함, 두려움, 불안), 난처함(궁색함, 곤혹스러움, 몸부림, 잘못을 인정함), 막막함(평범함, 외로움)을 허용한다.
인생의 유일한 도전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의 괴로움일 뿐이다. 괴로움->자신을 하찮게 여김->자기애/자기 공격은 영아기부터 이어져 온 업장의 연쇄 반응이다.
프롬: 행복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경험하고 진실하게 상호작용하는 능력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의 괴로움이 유일한 일이다. 괴로움을 품어 내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업장의 유일한 근원이다.
모든 것을 허용하면 더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 없어진다.
더는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최선을 다했다. 과거의 그 순간을 받아들인다. 현재와 자신을 배척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고통을 허용하고, 보고, 알아차리고, 기록한다. 일기를 쓰고 자신의 일상과 상태의 곡선을 기록한다. 에너지가 충만하고 평온한 순간들 속에서 자성이 언제나 함께 있음을 보고, 삶이 검붉은 용암 같고 진흙 속의 연꽃 같음을 본다.
현재의 핵심 과제, 고통, 곤경, 상처.
자신과 연결되고, 자신을 아끼고, 자신에게 감사한다. 이성과 감성에서 방향을 찾는다.
개인의 문제는 대부분 사회적 문제다. 자신을 공격하거나 위축되고 퇴행하는 일을 조금 줄인다.
무명의 업화
사람들은 흔히 ‘이름 모를 업화’를 느낀다. 괴롭지만 알아차리거나 묘사하기도 어렵다. 익숙한 먹구름, 무너져 내리는 느낌, “또 시작이구나”, 평온에서 고통으로 돌아간다. 심리학에서는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완화된다고 말한다.
어두운 면을 회피하기
자신의 감정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어두운 면을 회피하는 것은 자신과의 연결을 끊는 일이다. 리비도의 일부 업장이 다른 일부의 업장을 회피한다. 자만으로 열등감을 회피한다. 수행자의 작은 자아, 알아차리는 사람의 작은 자아가 업장을 회피하고, 통제로 통제 상실을 회피한다.
하지만 회피 역시 긍정적인 기제이며 자기 보호다. 자만은 열등감 때문에 무너지고 해리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고, 비위를 맞추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며, 통제는 안전을 위한 것이다. 회피는 아주 좋은 기제이지만, 건강하려면 다시 충분히 자신을 열고 받아들이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백혈병의 경우처럼, 백혈구는 본래 좋은 것이다.
두 번째 고통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고통과 막막함. 업장은 이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데다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상처가 가려워 긁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처럼, 두 번째 고통을 겪는 것이다.
《장자·잡편·양왕》에서 중산의 공자 모가 말했다. “그것을 알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첨자가 말했다.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면 따르십시오. 정신에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면서 억지로 따르지 않는 것을 거듭 상처 입는다고 합니다. 거듭 상처 입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없습니다!”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은 운명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감당하는 것은 내 운명에만 속한 고통이며, 그 배경에는 인류 역사의 이 단계에 공통된 고통이 있다. 불교에서는 행고를 말한다. 고통은 운명의 일부다. 그리고 나의 신성은 언제나 나를 지옥의 수렁에서 끌어낸다.
마르크스, 엥겔스, 펑더화이 총사령관, 장자, 소식 역시 자기 운명 속의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여야 했다.
《절관론》:
물었다. 이제 막 도를 배우는 사람이 갑자기 어떤 인연을 만나 타인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도에 부합합니까?
답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피할 수 없으면 맡기며, 참을 수 있으면 참으십시오. 참을 수 없으면 우십시오.
물었다. 운다면,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진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답했다. 공이로 종을 치면 그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반드시 자아가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대가 억지로 마음을 꽉 붙들고 이를 악문 채 입을 다물고 참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아주 큰 자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물었다. 제가 듣기로 성인은 병기에 다치지 않고, 고통에 꺾이지 않고, 감각의 대상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답했다. 모든 법에 자아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모두 도의 이치에 부합하며 아무런 걸림이 없습니다.
2.현재를 배척하고 혐오하며 현재와 해리되는 이 순간이 가장 괴로운 최저점이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고, 배척하며, 현재와 해리되는 이 순간이 이미 최저점이다. 업장이 가장 심하고 가장 어찌할 수 없는 때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부짖는 순간은 하루 중 가장 괴로운 순간이다. 하지만 결국 지나간다.
인생의 어려움은 똥구덩이로 몸을 던지거나 갱도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인데, 이것이 인류 대다수가 날마다 반복하는 일상이다. 푸른 행성 위의 소외되고 저주받은 인류, 사유제 차원의, 역사적 유물론 차원의 업장이다. 인간의 자성은 얼마나 강하고 밝은가. 그런데도 언제나 날마다 업장과 똥구덩이를 견디며 비추고 있다.
3.이 순간에는 자신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말자.
현재를 배척하고 혐오하며 현재와 자신으로부터 해리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부이며, 맞서 싸울 수 없다.
자신을 통제하고 당장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통제를 잃는다는 것은 충분히 품어 낼 수 없다는 뜻이며, 억지로 통제하려는 것 역시 망념일 뿐이다.
4.현재를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허용하고, 허용하지 못함을 허용하기
통제 상실을 알아차리고 허용하는 것 역시 품어 내는 일이다. 이것이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화해하는 마지막 수업이다.
우두선의 《절관론》에서 물었다. 무엇을 마음이라 하며, 어떻게 마음을 편안히 합니까? 답했다. 그대는 굳이 마음을 세울 필요도 없고, 억지로 편안히 하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편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용은 알아차림의 일부이며, 그 자체도 노력해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깨어나고서야 꿈꾸고 있었음을 안다.
현재를 살아가기에 대한 집착 깨뜨리기
사람들은 현존, 마음챙김 명상, 수행, 현재를 살아가기, 대가가 되기, 깨달음에 집착한다. 흔히 여전히 수행자의 작은 자아로,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육조단경》은 수행에 대한 집착을 깨뜨린다(청정에 대한 망념, 청정에 대한 집착). “사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나 망념 때문에 진여가 가려진다. 망상이 없기만 하면 본성은 저절로 청정하다. 마음을 일으켜 청정에 집착하면 도리어 청정에 대한 망념이 생긴다. 망념에는 처소가 없으니 집착하는 것이 곧 망념이다. 청정에는 형상이 없는데 청정의 형상을 세우고 그것을 공부라고 말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가로막고 도리어 청정에 얽매인다.”
현재를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허용할 때, 오히려 나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었다.
예전 침체기에 쓴 일기를 보면 감동한다. 그 순간순간 현재를 살아가던 나를 본다. 당시의 나는 현재를 살아가지 못한다고 자신을 싫어했지만 말이다. 본래의 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5.우리는 언제나, 결국 받아들이므로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자
우리는 결국 빠져나올 것이다. 우리는 결국 언제나 받아들이고 있으며, 끝내 운명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던 아이들도 결국 학교에 가듯이. 과거의 더 약했던 나도 결국 지금보다 더 힘들고 격렬했던 순간들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결국 똥구덩이와 갱도를 마주하게 된다. 생명은 제 길을 갈 것이다. 똥을 먹어야 할 때는 씹지 말자. 똥을 먹기 전의 저항이 가장 힘든 단계다.
우리는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용하지 못하는 이 단계를 자연스럽게 벗어날 것이다.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수많은 사람들의 실제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은, 보통 사람의 심리적 회복 능력과 적응·조절 능력이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마조어록》: “그대 자신이 바로 금강정이니, 새삼 뜻을 내어 마음을 모으고 선정을 얻으려 할 필요가 없다.”
6.일기를 쓰는 것은 진정으로 영과 통하고 부처를 예배하는 통로다
알아차림의 정도가 서로 다른 무수한 현재를 기록하여 이후의 현재가 참고하게 한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기에, 알아차리던 시기의 나, 에너지가 충만하던 나, 자성, 불성과 소통한다. 마음이 곧 부처다. 이것이 인간이 진정으로 영과 통하고 부처를 예배하는 통로다.
이것은 인류에게 몇 안 되는 진정한 ‘수행’ 기법인 듯하다.
노력은 허구의 개념이다. 우리는 일기 쓰기라는 기술을 배우기가 꽤 어렵다. 습관은 힘을 들인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가 깊은 연결이다.
사람들은 왜 일기를 쓰지 않거나, 써도 이런 효과를 얻지 못할까? 그런 의식과 능력(마음의 힘, 고통과 어두운 면을 회피하는 문제), 습관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알아차림’의 상태에 있을 때 일기의 놀라움을 알아차린 뒤에야 꾸준히 일기를 쓰게 된다. 성장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다.
7.《작은 자아의 좁은 현재 VS 본래의 나의 참된 현재》
업장이 가벼울수록, 작은 자아가 적을수록 좁은 현재에 얽매이는 일이 줄어든다. 이를테면 각종 사회적 시계와 사회적 규율이 그렇다. 물론 경계는 마음이 만들어 내므로, 작은 자아가 느끼는 다급한 현재 역시 ‘객관적’인 현재다(경계가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좁은 현재다. 본래의 나가 참된 현재와 연결되는 것이 힘, 온기, 치유의 근원이다. 천인합일이다.

(二)지금의 작은 일 하기
작은 일을 한다는 것의 요체는 ‘하기’가 아니라 작음에 있다. 거대하고 극적인 변화에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에 편안히 머문다. 자신을 보살핀다. 조정하고, 다지고, 채우고, 향상한다.
a.가볍고 작은 치유: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거대한 변화보다 작은 변화를 기대하고 소중히 여긴다. 거대한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흔히 탐욕·성냄·어리석음이다.
산책하고, 공원을 거닐고, 일기를 쓴다. 고통과 빛의 양면을 기록한다.
《산책에 관하여》: 산책은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이다. 노력도, 수행도, 의도적인 행위도 없다. 산책은 허용이다. 모든 부정적 감정을 허용한다. 모든 긍정적 연결을 허용한다. 산책은 현재를 살아가기이자, 작은 일을 하고, 에너지를 모으고, 크게 연결되는 일이며, 현재를 살아가기의 모든 요체다.
업무나 부업의 작은 일 하나 하기, 개인 미디어 계정 만들기, 집 청소하기 등. 작은 변화는 거대한 변화의 한 고리이자 단계다.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
최근 상태가 좋아지고 마음의 힘이 생김->당 섭취를 조절하고 건강하게 먹기로 결정함->더욱 전반적으로 좋아짐.
b.에너지 모으기
에너지를 모으고, 명상하고, 마음을 챙기는 것의 반대는 흩어짐, 잡념, 들뜬 혼란이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나기, 과제 분리, 단순함, 맑고 고요한 무위.
많은 사람이 현재의 과제가 아닌 일에 대한 불안에 빠져 있지만, 그 근원은 여전히 현재의 과제에 있다.
많은 경우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를테면 AI 불안과 정치적 우울을 느낄 때 소셜 미디어를 끊는 것이다.
에너지를 모으는 구체적인 상황들: 일은 은밀히 추진해야 이루어지니 묵묵히 힘쓰기, 실질에 힘쓰고 공허함을 좇지 않기, 말과 생각이 지나치게 활발해지지 않게 하기.
차분히 응집하고 들떠 어지러워지지 않기, 자신을 잘 돌보기: 에너지 모으기+자신과 연결하기, 에너지가 아주 낮을 때는 묵묵히 산책하기.
에너지를 모으고 바른길을 따르며 자신을 믿는 것이 곧 현재를 살아가기이고, 자신 및 세계와 연결되는 일이다.
바른길에 집중해야 도를 얻은 사람에게 도움이 모이며, 바른길 위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을 만난다. 잡다한 사람과 생각과 길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
가치 투자는 투기와 어리석음을 가라앉히고, 자신과 마음의 힘, 에너지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일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과학과 재야 철학의 논의를 한데 모아 정돈한다. 심리학, 장자, 깨달음, 본래의 온전함은 마음을 모으는 일이다. 그 뒤에는 자연을 따르고, 타고난 재능을 따르고, 운명을 따른다.

(三)연결
인간의 자성의 빛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힘을 쓰는 것은 소용없으므로, 문제는 연결이 왜 끊어졌는지, 어떤 업장이 가리고 있는지에 있다.
다섯 요소, 즉 학업, 직업, 자신(몸, 마음), 타인과의 연결 상태를 살핀다.
자신과 연결하기: 몸(감각, 운동, 식사, 수면), 마음. 과거의 자신(상처, 최선을 다함), 현재의 자신과 연결한다. 《자신과 연결하는 법》: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 핵심이다. 에너지 모으기+자신과 연결하기.
자성과 연결하기: 자성을 보고 과거의 자신과 연결한다. 최근 자신의 자성의 빛(깊은 지혜)이 드러난 사례들.
바른 마음과 연결하기: 천인합일, 감사와 복을 소중히 여김, 빛과 진선미.
현재와 연결하기: 현재의 핵심 과제, 작은 변화, 현재의 자신, 자성, 심층의 마음/리비도, 느낌.
학업 및 직업과 연결하기: 핵심적인 조건부 자신감과 높은 에너지의 흐름에 연결되어, 업무를 해낼 수 있다는 감각과 직업적 자신감을 되찾는다. 개인 미디어에 글을 쓰는 것도 자신감과 연결감을 높여 준다.
타인과 연결하기: 무턱대고 사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미디어, 좋은 책 읽기, 교류 대상의 선별이다.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주변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인민/사회/역사/세계/대자연/우주와 연결하기.
마르크스: 인간의 본질은 모든 사회적 관계의 총체다.
이상의 것들을 우리는 모두 경험했다. 기쁨, 평온, 충만한 에너지는 누구나 매일 경험한다. 다만 짧게 지나가고 간과할 뿐이다.
연결은 무조건적이며 언제나 존재한다. 업장이 가벼울수록 현재에 더 편안히 머물고, 더 깊이 느낀다.
《연결 VS 얽매임: 세계와의 관계》

연결과 실사구시
실사구시는 현재, 자신, 타인과 잘 연결되어 있다는 표현이다.
자신과 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해리되고 막막해진다.
타인과 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환상과 탐욕·성냄·어리석음에 빠져 현재 인연의 경계를 넘어선다.
현재와 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저항하고 초조해진다.

이、현재에 편안히 머물기
수단이 아니라 상태다.
바쁠 때는 바쁘고, 한가할 때는 한가하고, 잘 때는 자고,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스럽다. 현재에 편안히 머물고, 운명에 편안히 머물고, 자신 안에 편안히 머문다. 밖에서 구하지 않고,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며, 자신의 자성의 빛과 연결된다. 어떤 사람과 일을 만나게 될지는 운명의 안배를 편안히 받아들인다. 먼저 고요해지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현재에 편안히 머물 수 있다.
1.판단 기준
판단 기준: 자신을 달래고 품어 주기->안전하고 평안함->자신감과 자유로움->흐뭇하고 흡족함.
《임제록》: “그대의 한 생각의 마음이 스스로 속박을 풀고 어디서나 해탈할 수 있으니, 이것이 관음삼매의 법이다.”
현재에 편안히 머물지 못한다는 것은 현재 및 현재의 자신과 연결이 끊어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붕괴하고 해리된다. 괴로움, 공황, 절망, 막막함.
현재가 불편하고 평안하지 않으면 회피하며 밖에서 구하고,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며, 과거와 미래도 불편해진다.
현재에 편안히 머물러 현재가 편안해지면, 미래와 과거도 더 편안하고 낙관적으로 느껴진다.
2.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요체 하나는 거센 물살과 탁한 파도 속에서 긴장을 푸는 것이다
현재에는 흔히 격렬한 동요와 도전, 자신을 집어삼키고 파묻는 감정과 침체가 많다. 긴장과 허둥거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정, 여유, 이완, 유연함, 순응.
근본은 여전히 편안히 머무는가에, 큰 자신감에 있다.
3.평범한 사람 누구나 현재에 편안히 머물러 본 적이 있다
평온과 지극한 기쁨, 본래의 온전함, 현재에 편안히 머물기라는 궁극의 피안과 복잡한 개념을 누구나 자주 경험한다. 다만 시간이 짧고 연결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것이 본래의 온전함의 한 단면이다. 또는 ‘수행자의 작은 자아’가 통제할 방법을 찾아 당장 도달하는 데 집착하기도 한다.
깨달음의 기준은 ‘본래의 온전함’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 매 순간 느끼거나 자성의 빛 속에 있을 필요는 없다.
‘현재를 살아갈 수 없는’ 현재에 편안히 머무는 것 역시 편안히 머무는 한 방식이다.
4.직장 생활을 예로 들면:
사람들은 흔히 끊임없이 이직하고 불평하면서 완벽한 일자리와 상사를 상상하거나, 어떤 고급 철학을 깨달아 뛰어난 인물이나 대가가 되거나, 무슨 자격증을 따거나, 시와 먼 곳을 찾거나, 어떤 조건에 도달해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
이직, 불평, 떠나기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은 훗날 알게 된다. 궁극적인 ‘해탈’과 초월은 마침내 어느 이직에서, 어느 현재에 우리가 현재를 편안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임을.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눈에도 평범한 일과 시간으로 보이고 일상에도 고통이 가득하며,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함께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 마음이 편안한 곳이 나의 고향이다.
그 평안함 속에서 우리는 안정되고, 성장하고, 진화했으며, 지금까지 자성의 빛이 드러났던 파편 같은 순간들을 이어 붙였다. 직업 생활은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고, 자신을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일과 삶의 균형을 잡고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스물다섯에서 스물아홉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평범한 직장인 누구나 묵묵히 어떤 리듬을 찾아냈다.
우리는 자신이 줄곧 묵묵히 승화하고 진화해 왔으며, 깊은 자성이 줄곧 묵묵히 작동해 왔음을 깨닫는다. 자성에 본래의 온전함이 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자성이 만법을 낳을 수 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우리는 그저 그것을 더 많이 이해할 뿐이다. 과거의 자신에게 감사하고, 현재의 자신에게 감사한다.
(四)운명을 편안히 받아들이기
시세와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헤아리거나 맞설 수 없다. 사람이 할 일을 다했고, 천명을 편안히 받아들였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으므로 매 순간에 편안히 머문다.
열자: “농부는 때에 맞춰 일하고, 상인은 이익을 좇고, 장인은 기술을 추구하고, 벼슬하는 이는 형세를 좇으니,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농사에는 홍수와 가뭄이 있고, 장사에는 이익과 손실이 있으며, 기술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고, 벼슬길에는 때를 만남과 만나지 못함이 있으니, 운명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현재를 따르기
반야, 청정, 출세간, 피안에 집착하면 피안에 이를 수 없다. 본래의 온전함이 있으니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현재가 곧 피안이다.
현재의 모든 고통과 업장을 따르고, 현재의 모든 평온과 기쁨도 따르며, 시대와 운명의 흐름을 따른다.
장자의 여덟 가지 없음: 자아도 집착도 없고, 능력을 내세움도 인위적 행위도 없고, 욕망도 구함도 없고, 근심도 염려도 없다.
《열자》에서 순임금이 말했다. “내 몸이 내 소유가 아니라면 누구의 소유입니까?” 답했다. “천지가 맡긴 형체입니다. 생명은 그대의 소유가 아니라 천지가 맡긴 조화입니다. 본성과 운명은 그대의 소유가 아니라 천지가 맡긴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자손은 그대의 소유가 아니라 천지가 맡긴 변모입니다. 그러므로 걸어가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머물면서도 무엇을 지키는지 모르며, 먹으면서도 그 까닭을 모릅니다. 천지의 왕성한 움직임은 기일 뿐인데, 또 어찌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군자가 곤궁함을 굳게 지키는 일에 대한 장자의 논의》: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가 엄습하고, 곤궁함과 막힘으로 뜻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천지의 운행이자 만물의 끝없는 움직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천지 만물의 운동과 변화에 조화를 이루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신하가 되어서는 감히 임금의 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신하의 도를 지키면서도 이처럼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하늘의 도를 대할 때는 어떠하겠는가!”
현재를 살아가기는 미래와 연결되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미래를 공상하고 미래에 얽매이는 것은 미래와 연결되는 것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