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기’를 논하다
‘현재를 살아가기’를 논하다
인생에는 오직 하나의 도전이 있을 뿐이다. 바로 지금이 괴롭다는 것.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기는 마음 철학의 궁극적 과제다.
- 지금 이 순간의 원만함
본래의 온전함, 자성의 광명
누구에게나 본래의 온전함이 있으며, 지금 이 순간 무조건적으로 원만하고 존재한다. 노력할 필요가 없다. 밖에서 구하기도, 안에서 구하기도 멈추라.
본래의 온전함과 궁극의 고요함은 누구나 경험해 보았다. 다만 순간일 뿐이다. 흐린 하늘 사이로 드러나는 푸른 틈새처럼.
삶은 용암과 같다. 검디검은 업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릴 수 없는 뜨거운 자성의 광명도 그 사이에서 반짝인다.
삶은 연꽃과 같다. 진흙과 구정물도 있지만 푸른 잎과 흰 연꽃도 있다. 그리고 그 꽃이 바로 우리의 원만한 자성의 광명이다.
걸음마다 원만하다
과거는 언제나 원만했고, 자성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으며,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원만하다.
걸음마다 원만하고, 걸음마다 흐름을 따르며, 걸음마다 바람을 타고, 걸음마다 자연스럽다.
삶에 무엇이 부족한가, 과거에 무엇이 아쉬운가, 미래에 무엇을 더 바라는가, 삶과 죽음에 무엇이 두려운가. - 치유와 수행은 어디에 힘을 쏟아야 하는가? 힘을 쏟으면 곧 어긋나니, 저절로 자연스럽게
(1) 앞선 글 「노력은 허구의 개념이다」, 「수행은 허구의 개념이다」
모든 사람은 이미 최선을 다했다. 더 힘을 쓰는 것은 집착이다. 소식은 유언으로 “힘을 쏟으면 곧 어긋난다”라고 했다. 인간이 마음의 성장 속도를 통제할 수 있을까? 없다. 우두선의 ‘절관’은 사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수행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경덕전등록·본정선사』에는 이렇게 나온다. “도의 본체는 본래 닦을 것이 없으니, 닦지 않으면 저절로 도에 부합한다. 도를 닦겠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한다.”
마음의 일에서 우리에게는 그리 큰 자유가 없다. 우리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우주의 한 고리이며, 사회적 관계의 총체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큰 자유도, 그만큼 큰 책임도 없다.
(2) 저절로 자연스럽게
사람은 어떻게 높은 활력과 충만함, 마음챙김과 현존으로 돌아가는가. 진정한 치유와 변화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힘을 써도 소용없고, 힘을 쏟으면 곧 어긋난다.
(3) 알아차림 - 알아차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매일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들, 곧 휴식, 식사, 운동과 활동, 혈당 조절, 깊이 생각하기, 업장의 얽힘을 멈추기, 자성과의 연결을 회복하기에는 모두 높은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육조단경』에는 “앞선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이고, 뒤이은 생각이 깨달으면 곧 부처다”라고 했다.
매일 힘을 들여 애쓰는 일들은 흔히 수동적으로 하는 일이거나 스스로 번뇌를 만드는 일이다. 알아차림의 정도가 높아지면 그 안의 업장 상태를 덜 수 있다.
하지만 알아차림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기가 중요하다. 알아차림이 높은 상태와 낮은 상태를 연결해 준다. -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알아차림뿐이지만, 알아차림 또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번뇌만 더하던 데서 자연스러운 치유로 나아갈 뿐이다. 알아차림은 업장의 자동 운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노력과 수행을 멈추는 것은 또 다른 겹의 업장에서 벗어나 리비도의 자동 운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열자는 말했다. “정신이 만나는 것은 꿈이 되고, 몸이 접하는 것은 일이 된다. 그러므로 낮의 생각과 밤의 꿈은 정신과 몸이 만난 것들이다. 정신이 응집되면 생각과 꿈은 저절로 사라진다. 깨어 있음이 참되다고 믿어도 말로 다 할 수 없고, 꿈이 참되다고 믿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 모두 만물의 변화 속에서 오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잠들기:
잠은 흔히 작은 자아가 퇴근하고 원초아가 출근하는 것이다. 마음 편히 잠든다는 것은 작은 자아가 마음 편히 퇴근하는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고 집착에 빠진 채 휴대전화를 붙들고 깨어 있는 데 매달리면, 오히려 수면과 ‘깨어남’을 방해한다.
졸리면 자고 원초아에 자리를 내주라. 졸리기 전에 먼저 잠드는 것은 더 큰 지혜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 호흡을 통제하고 명상하려는 집착
우리는 결국 호흡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 명상의 요체는 이완, 마음챙김, 자성의 치유다. 명상은 기술이 아니라 결과이자 전략적 상태다. 힘을 주어 명상하는 것은 오히려 이완하지 않는 것이다.
(4) 우리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걸음마다 자연스럽고, 걸음마다 자유롭다. 자유는 이미 우리의 매 순간에 드러나 있다. 자성은 매 순간 이미 최선을 다했다.
다만 업장이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뿐이다. 망념과 집착은 작은 자아에서 생겨난다. 날뛰는 마음이 쉬면 그것이 곧 보리다. - 알아차림과 높은 활력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흔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질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록한다. 한숨 자고 나니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오늘 공원을 거닐었더니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어렵고 괴롭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뜻밖에도 끝냈고, 결과도 놀라웠다. (이런 일들은 흔히 배를 부르게 한 마지막 만두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비법을 터득해 이제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무의식이 더 위로받고 안심하며, 원초아의 밝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람이 타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성의 연결을 통해서이지, 힘을 쓰거나 강요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일기 쓰기나 산책처럼 가볍고 작은 치유 활동을 권한다고 하자. 상대방은 실제로 그것을 했고(마침 그럴 마음의 힘과 흥미, 상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나중에는 다시 멈췄다), 실제로 긍정적인 변화도 느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을 돕는 기술을 터득한 것도, 상대방이 ‘노력’의 기술을 터득한 것도 아니다. 자성의 연결 자체가 작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서로 지금 이 순간 이미 충분히 ‘좋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에게는 자성을 통해 스스로 수렁에서 빠져나온 경험이 여러 번 있으니, 이번에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연결의 관점에서 보는, 노력하면 곧 틀리고 힘을 쏟으면 곧 어긋나는 이유」: 좋은 습관의 핵심 역시 연결이다.
습관은 힘을 써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힘 회복 → 지금 이 순간의 작은 일 → 마음의 힘 강화, 업장의 소화, 자성의 광명이라는 선순환이다. 마음의 힘 → 경험 → 연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두고 마음의 힘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치유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 「현재를 살아가기의 구체적 실제를 논하다」
(1) 지금 이 순간을 보고 기록하기 (2) 지금 이 순간의 작은 일 하기 (3) 연결하기 - 업장 → 깨달음 → 먼저 고요해짐
우리는 마침내 사유의 경계를 이해했고, 사유를 멈추고 노력을 멈추며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과정을 이해했다.
계·정·혜. 바름, 고요함, 밝음, 비움. 빈 방에 빛이 생겨난다.
깨달은 뒤에는 자성의 광명과 자주 연결된다. 따뜻한 햇볕이 얼음을 녹이듯 많은 내면의 업장이 ‘더 빠르게’ 치유되고, 끊임없이 ‘고요함’으로 나아가게 된다. 고요함에 이르면 업장의 얽힘에 덜 빠지고 막힘도 줄어들며, 많은 안팎의 업장이 ‘더 빠르게’ 소화된다. 하지만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된 많은 업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돈을 둘러싼 업장이 그렇다. 예를 들어 장구이메이 선생은 여전히 후원을 구하고 윗선에 협조해야 한다. 현실이 그렇게 하도록 내모는 것이다.
깨달음은 영혼의 차원에서 엔트로피 증가가 엔트로피 감소로 돌아서는 전환점이며, 사람이 진정으로 영혼의 성인이 되는 일이다. (앞선 글 「인생의 다섯 요소가 비약하는 특이점」)
깨달은 사람, 고요한 사람은 실제로 타인에게 이롭다. 『장자』에서 말하는 ‘고요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먼저 고요해진 사람’이 ‘뒤에 고요해지는 사람’을 이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끌 수 있을지는 인연과 자연스러운 흐름에 달려 있다. ‘먼저 고요해진 사람’은 자신의 객관적인 영향력을 알고, 그 경계도 안다. 경계를 넘지 않고, 타인의 진도를 통제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고요해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기의 미소가 방 안의 모든 사람을 고요하게 하고 황홀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아기는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이 귀엽다는 것을 알고 귀여움을 뽐내는 아이들은 더는 귀엽지 않다. 업장에 빠져 천진함과 자연스러움을 잃고, 사람들과의 자성의 연결을 잃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사람을 고요하게 만드는 인격의 광채가 있었지만, 그들 역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화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
업장이 상대적으로 조금 얕은 사람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좋은 중등학교 교사가 자신이 학생에게 미치는 엄청난 긍정적 영향과 그 한계를 알고, 망념이나 망동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이 ‘인연’이다.
좋은 교사가 학생에게 미치는 엄청난 영향에서도 ‘자성’의 강력함을 볼 수 있다. 조금만 연결되어도 엄청난 울림이 생긴다. 동시에 업장의 강력함도 볼 수 있다. 앞선 글 「작은 불씨들이 서로 비추어 빛나다」.
심리상담 분야의 지식과 ‘능력’은 상당 부분 여러 유형의 상담사가 내담자에게 객관적으로 어떤 작용을, 얼마나 하는지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정신분석, 인본주의, 실존주의 등의 학파는 모두 작용하는 것이 ‘연결’ 자체임을 ‘인식’하고 있다.
『마조어록』: “스스로 맑고 고요해져 타인도 맑고 고요하게 하고, 스스로 편안해져 타인도 편안하게 한다.”
평범한 두 행인이 길에서 서로 미소로 인사를 나눌 때, 자성이 연결되는 그 순간 치유가 일어난다.
천하가 언제 고요해질지는, 오직 역사적 유물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 지금 이 순간이 곧 피안이다
- 사람에게 진실한 세계는 오직 하나, 지금 이 순간뿐이다.
모든 실상은 지금 이 순간에 있다. 허상과 실상을 분별하는 것이 곧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안팎의 모든 자원과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은 지금 이 순간에 있다.
모든 인연과 기회, 가능성의 실상은 지금 이 순간에 있다.
모든 학업과 사업은 지금 이 순간에서 시작한다. - 지금 이 순간이 곧 피안이다
모든 아름다운 경험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다.
모든 자유와 자성의 광명, 주체성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도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뒤나 모두 우주의 동등한 일부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나 마음이 있고, 내가 있고, 집착이 있기에 우주와 서먹해진 것이다. 무심으로 도에 합일한다.
자성의 광명으로 자신과 연결되고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곧 천인합일이며, 지금 이 순간의 무조건적인 행복과 고요함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주의 한 고리다.
피안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지금 여기서 깨닫지 못한다면, 언제 어디서 깨달을 것인가? - 자성으로 운명에 순응하고, 무심으로 도에 합일하다
출세간 대 입세간은 허구의 개념이다. ‘세상을 떠날 것인가, 세상에 참여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흔히 지금 이 순간을 회피하고 지금 이 순간과의 연결을 끊는 것일 뿐이다.
세상에 참여하는 일과 운명에는 업장의 숙명, 곧 돈을 벌어 생계를 잇는 일도 있고, 타고난 재능의 밝은 사명도 있다. 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세상을 떠난다는 것도 애초에 없었다. 깊은 산속에서도 땔감과 쌀, 기름과 소금, 자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사람이 자기의 역사적 사명과 밝은 사명에 올바른 마음과 길로 임하며, 밖에서 구하지 않고 탐욕·성냄·어리석움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 참여가 바로 지극히 세속을 벗어난 삶이자 자유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펑더화이 장군, 장자, 그리고 평범한 삶 속에서 줄곧 자성의 광명을 따라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그렇다.
자성으로 운명에 들어가는 것이 장자의 성명학이다. 무심으로 도에 합일하고, 역사적 유물론 및 변증법적 유물론에 합치한다. - 타고난 재능이 곧 운명이고, 운명이 곧 타고난 재능이다
누구나 자성은 원만하고 평등하며, 차이는 모두 후천적 만남과 환경에서 생긴다. 타고난 재능이 곧 운명이고, 운명이 곧 타고난 재능이다. 현재를 살아가며 운명을 받아들이고 운명과 연결되는 것만이 타고난 재능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이다.
-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실사구시
이것이 선종과 장자, 마르크스주의가 도달하는 종착점이다. 사실 아무것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야 한다. 수많은 소시민이 겹겹의 업장을 뚫고 나아가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상태에 도달한다.
산을 보면 여전히 산이다. 변함없는 이치를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걸음마다 원만하며 자연에 순응한다.
무심과 무집착
우두선: 관조를 끊고, 무심으로 도에 합일하며, 도의 본성은 자연스럽다. 마조선: 평상심이 곧 도이고, 일이 없음이 곧 부처다. 지금 이대로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 상황에 응하고 사물을 대하는 것이 모두 도다.
『경덕전등록』에서 사조는 우두종의 법융 대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자성에는 본래의 온전함이 있다. 벗어날 삼계도 없고, 구할 보리도 없다. 다만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로이 두면 된다. 관상하거나 수행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 마음을 탁 트이게 하여 걸림 없이 자유로이 오가라.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이에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인연이며, 언제나 부처의 오묘한 작용이다. 너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로우면 된다. 일부러 대처하거나 처리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를 상주하는 법신이라 부르며, 이 밖에 다른 변화는 없다.”
『장자·대종사』는 좌망을 말한다. 안회가 말했다. “사지와 몸을 잊고, 총명함을 물리치며, 형체를 떠나 앎을 버리고, 큰 통함과 하나가 되는 것, 이를 ‘좌망’이라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하나가 되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고, 변화하면 고정됨이 없구나.”
세상에 막히지 않고, 세상에서 마음을 노닐다
업장은 필연적으로 흐름을 막는다. 업장이 적어야 흐름을 더 잘 따르고 여유롭게 해낼 수 있다.
장자는 무아와 무집착을 ‘빈 배’의 사례로 말한다. 배에 아무도 없을 때, 곧 나도 집착도 없을 때는 무엇과 부딪혀도 탐욕·성냄·어리석움이 없다. 마음이 매어 있지 않은 빈 배와 같아 흐름을 따르고 인연에 맡긴다. 세상에서 마음을 노닌다.
『육조단경』: “오고 감이 자유롭고 마음의 본체에 막힘이 없으면, 그것이 곧 반야다.” 『심명』: “본성이 공함을 알면 저절로 벗어나니, 뜨고 가라앉음을 흐름에 맡긴다. 총애와 치욕에도 변하지 않고, 머무를 곳을 가리지 않는다. 생겨남이 없는 마음으로 사물에 순응하고, 어디서나 그윽하게 깃든다. 모든 인연이 문득 쉬고, 일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하는 일에 막힘이 없고, 떠나든 머물든 모두 평온하다. 고요하여 일어남이 없고, 탁 트여 자유로이 오간다. 도를 즐기며 편안하고, 참됨 속에서 유유히 노닌다.”
열자: “마음이 응집되고 몸이 풀리며, 뼈와 살이 모두 녹아든다. 몸이 어디에 기대는지, 발이 어디를 딛는지도 느끼지 못한 채, 마른 나뭇잎이나 껍질처럼 바람을 따라 동서로 간다. 마침내 바람이 나를 타는 것인지, 내가 바람을 타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실사구시
세계의 복잡한 실상과 연결되는 것만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또는 마르크스처럼 역사적 유물론의 천명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상주의는 공리와 저속함에 반대한다. 공상과 도피가 아니라 몸소 도에 합일하는 것이다.
『도덕경』: “무릇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나지만, 저마다 그 뿌리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고요함을 본래의 명으로 돌아감이라 한다. 본래의 명으로 돌아가는 것을 변함없는 이치라 하고, 그 이치를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변함없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흉하다. 그 이치를 알면 포용하고, 포용하면 공평하며, 공평하면 온전하고, 온전하면 하늘에 합치하며, 하늘에 합치하면 도에 합치하고, 도에 합치하면 오래가니, 몸이 다할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사구시를 말한다. 소박하고 실무적이며, 자신의 도가 큰 도와 공명하고 연결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다시 태어나기
현재를 살아가라. 지금 이 순간을 더 이해하고 지금 이 순간과 더 연결될 때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이어받는다.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 마침내 운명과 연결되고 자기 운명이라는 버전의 총아가 된다. 환생 소설과 시공간 이동 소설이 인기를 끄는 것은 인생 자체가 본래 무수한 시공간 이동과 다시 태어남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회는 본래 작은 자아의 생겨남과 사라짐을 가리킨다. 아홉 생의 윤회와 무간지옥을 거쳐, 마침내 크게 이룬다.